1980년, 대학교 1학년 때였다. 이른바 민주화의 봄이라던가. 79년 말 18년 장기 집권 대통령이 유고 되고 나라가 중심을 잃고 뒤숭숭하던 그해 5월이었다. 김대중 구속, 김영삼 연금 등으로 실망한 민중들의 시위로 전국이 들끓고 있을 때였다.
517 계엄확대. 대통령 유고 이후 계엄의 범위가 점차 좁아지고 있었는데 갑자기 전국으로 확대한다는 발표였다. 정보가 차단되어 있던 당시는 자세히 몰랐지만, 광주 민주화 항쟁이 터진 것이었다.
거리엔 장갑차 등으로 중무장한 군인들이 활개를 치고 교정은 그들의 숙소로 변해버렸다. 학교는 기나긴 휴교에 들어갔고 머리 허연 노교수가 어린 병사에게 쌍욕을 들어야 했다. 다섯 명만 모이면 불법 집회가 되고 죄가 있든 없든 연행이 일상화되었다. 온 주머니, 가방을 뒤지는 검문검색 또한 늘 당하는 일이었다. 힘든 세월이었다.
휴교는 9월이 되어서야 풀렸고 1학년 1학기는 지워져 버렸다. 휴교령 해제의 조건으로 우리는 학교 운동장에 모여서 뭘 반성해야 할지 모르는 반성 궐기 대회를 열어야 했으며 당월에 바로 신병 훈련소보다 빡쎗던 9박10일 50사단 병영 훈련을 다녀와야 했다. 바로 곁, 울타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삼청 교육대가 비명을 지르는 그곳, 50사단에서.
이것이 계엄이다.
어젯밤에 계엄 소동이 있었다. 화도 나고 무섭기도 하고 그랬다.
아직 우리나라는 멀었다.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좀 더 격 높은 민주주의를 기대한 게 무리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