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水.
흰 물, 맑은 물이라는 뜻이다.
시인의 고향 金泉의 뒷글자를 파자(破字)하면 白水가 된다.
또,
1919년에 태어나 2016년에 돌아가셨으니까 거의 백수를 사셨다.
그의 號도 역시 시인답다.
그의 호처럼 깨끗하고 정갈하게 살면서
우리에게 白水 같은 작품들을 남겨주고 떠났다.
“나는 시 지상주의자이면서 시 전도사야.
남녀, 학력, 노소 가리지 않고 늘 시를 권하지.
시를 쓰는 것이 즐거우니까 권하는 거지.
시를 안 쓰면 무슨 재미로 사누.”
시에 재주가 없는 수많은 이에게 똑같이
시를 권하면 어떻게 하느냐는 볼멘 질문엔
이렇게 대답했단다.
“농부가 땅에 씨를 뿌리면
많이 거두는 이도 있고,
조금밖에 못 거두는 이도 있지.
그러나 아무것도 못 거둔 이는 없는 법이야.
타고나지 않아도 노력한 만큼은
반드시 거두게 돼 있으니까.”
이 말에 나 같은 凡人들도 용기를 얻는다.
노력하면 거둘 수 있다고 한다.
일본강점기 때 태어나 항일 인사로 찍혀
오른쪽 중지를 쓸 수 없게 되었지만
그는 고통마저도 시로 승화시켜 절창을 남겼다.
등단에 별 관심이 없이
고향 김천에서 창작 활동에만 매진하던 시인은
청마 유치환의 강권으로 마음이 움직여
곧바로 1960년 서울신문, 국제신보,
1962년 조선일보, 1967년 동아일보 등
신춘문예를 휩쓸며 중앙문단에 모습을 드러냈다.
“시는 벌판에서 와.
외롭고 쓸쓸할 때, 그때 시가 나와.”
“안일하거나 가득 차면 시가 안 나오거든.
시가 떠오를 때는 일부러 밥도 두세 끼니씩 거르기도 해.”
이것이 그가 말한 창작 정신이다.
그의 詩語에 대한 조탁彫琢 정신은 이미 정평이 나 있다.
“청산아, 왜 말이 없이 학(鶴)처럼만 여위느냐. ”
이 단 한 구절을 조탁하기 위해
그의 다락방에서 수많은 날을 지새우며
코피를 쏟았다고 한다.
바로 이런 정신을 본받아 창작 활동에 임해야 한다.
그의 絶唱, “祖國”을 보면
그가 남긴 시 정신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祖國 정완영
행여나 다칠세라 너를 안고 줄 고르면
떨리는 열 손가락 마디마디 에인 사랑
손닿자 애절히 우는 서러운 내 가얏고여
둥기둥 줄이 울면 초가삼간 달이 뜨고
흐느껴 목 메이면 꽃잎도 떨리는데
푸른 물 흐르는 정에 눈물 비친 흰 옷자락
통곡도 다 못하여 하늘은 멍들어도
피맺힌 열 두 줄은 굽이굽이 애정인데
청산아, 왜 말이 없이 학(鶴)처럼만 여위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