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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기일

by 신화창조

오늘은 할아버지 기일이다.


벌써 21년이 흘렀구나. 2004년의 일이니까.

1911년에 나셔서 2004년까지,

우리 나이로 94세, 만 93년을 사셨다. 적지 않은 세월이다.

30대에 해방을 맞고, 40대에 전쟁을 겪으셨다.


해방 후 전쟁 전까지의 극심한 혼란기도

정면으로 맞닥뜨리셨다.

1947년 대구 폭동 사건의 소용돌이 속에서

일생일대의 큰 피해를 입으셨던 것이다.

밤에는 인민재판이,

낮에는 경찰들의 단속이 이어지는 날들.

매일 死線을 넘나들었단다.

사람의 목숨이 파리 목숨보다 못하던 시대.

어느 이념에도 오염되지 않으셨던 당신은

어느 쪽에도 속할 수 없었다.

억장이 무너지는 일이지만

힘없는 민초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었을까.

그저 목숨 부지하기 위해 숨어 지낼 밖에.


부모님마저 일찍 여의신 할아버지는

홀로 가족을 지키기가 쉽지 않으셨다.

우여곡절 끝에 살아남으셨으나

심약하셨던 당신은 결국 정신을 놓으셨다.


가족에게는 큰 불행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그 막막한 현실이 난리통에

목숨을 보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50여 년 동안 아무도 할아버지를 괴롭히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살아 남으셨다.


할머니와 어머니 역시 대단한 분들이셨다.

비록 할아버지는 유폐에 가까운 생활을 하시게 되었지만,

조금도 주눅 들지 않으신채

집안의 최고 어른으로서 깨끗하고 당당하게 사시다가

천수를 다하시고 떠나시게 모시고 돌보셨으니까.




40대 이전의 할아버지는 정말 멋진 분이셨다고 한다.

키가 크고 미남이셨으며, 힘도 좋아 씨름 시합에서 상을 받아오셨다.

약간의 바람기로 할머니 속을 썩이신 적도 있었고,

당구도 치시고 바둑도 두셨단다.

그 시대에 그 정도면 대단한 멋쟁이셨다.


할아버지를 떠올리면 좋은 기억이 많다.

물론 모든 아이들을 유별나게 좋아하셨지만,

특히 장손인 나를 예뻐해 주셨다.

구십 년을 사시면서 단 한 번도 내게 화를 내신 적이 없었다.

늘 한결같은 온화한 표정으로,

그저 따뜻한 손길을 내밀어 주셨다.

돌아가시기 1년 전, 93세 때,

어머니께 전화가 왔다.

곧 떠날 것 같다며 나를 불러내셨다.

의식이 없던 당신은 나를 보자 기적처럼 의식을 되찾고,

환한 미소로 맞아주셨다.

모두 기적이라 했고, 내 덕분이라 했다.


‘내가 뭘 했다고 단지 손잡아 드린 일 밖에...’


그리고 1년을 더 사시고 떠나셨다.

오늘이 그 어른의 기일이다.


제사는 내가 모신다.

번거롭다고 생각하면 끝이 없겠지만,

오늘 하루, 옛 어른을 추억할 수 있다는 점에서 뜻 깊다.


하지만

함께 나이 들어가며 제사 준비로 분주한

아내를 보면 애처롭기도 하다.

감사하게도 아내는 어떤 불만을 말하지 않는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물론, 제사 문화를 현실에 맞게 개선하고 정비해야 할 책임이

장손인 내게 있다.

누구를 위해서라기보다,

제사의 본래 의미를 지키면서도 시대에 맞게 변화시켜야 한다.

당연히 해야 한다. 그래야 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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