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어릴 때,
부모님은 직장을 따라 대도시로 분가를 했다.
그때는 동생들이 아직 태어나지 않아
누나와 나를 포함해 네 식구뿐이었다.
나는 네 살, 누나는 일곱 살.
지금은 두 시간 남짓 걸리는 거리를
무려 10시간이나 걸려서 대구로 왔다.
버스가 나룻배에 실리기도 하고,
아스팔트보다 흙길이 많았던 1964년의 기억.
새벽밥 먹고 캄캄할 때 출발해서
해지고 한밤중에 도착한 도시, 대구.
그리고 쭉 대구에서 성장했다.
동생들이 계속해서 태어나고
가난한 살림에 네 아이들을 보살펴야 했던 어머니는
조부모님이 제일 좋아하는 장손인 나를 방학만 되면
고향 산촌으로 강제 유폐(?)시켰다.
전기도 안 들어오는 산촌에서의
여름 겨울 연중 두세 달,
좋기도 하고 힘들기도 하고 그랬다.
가장 힘든 건
분리되었다는 불안감과 심심한 생활이었다.
해만 떨어지면 자고 해 뜨면 일어나는
단조로운 생활 속에
친구 하나 없는 심심함이 가장 힘들었다.
좋았던 건 조부모님의 한없는 사랑과
자연 환경 전부가 내 것이라는 것.
그래도
며칠만 지나고 나면 심심함은 금세 적응이 되고
왼종일 온 산을 누비고 다녀도 누가 뭐랄 사람이 없어 좋았다.
산새도 친구가 되고, 싸리문을 기어들어온 꿩 병아리도,
키 큰 소나무, 작은 솔방울, 풍뎅이,
솔밭 정자 앞에서 누워 자는 황소, 모두 내 친구였다.
산딸기, 복숭아, 토마토, 전부 내 것이었다.
하루 종일 밭을 매던 할머니는 내가 심심할까봐
그나마 시간이 나는 저녁엔
내 손을 잡고 고개를 하나 넘어 옆 마을로 밤마실을 다니셨다.
그 덕에 옆 마을 할머니들 전부를 나는 안다.
할머니들 모두 친 손자처럼 나를 사랑해 주셨으며.
다만 할머니들은 항상 너무 많은 것을 먹여 나를 힘들게 했다.
먹어도, 먹어도 한도 끝도 없이 뭘 자꾸 먹으라셨다.
너무들 예뻐해서 가끔 내가 버릇이라도 없어지면
“이놈!”
하시며 정신이 번쩍 들게 해주시는 할머니도 계셨다.
이후 다 자라서 언제든 고향을 방문하기라도 할라치면
습관처럼,
이웃 마을 모든 집을 순례하며 배가 터지도록 인사를 다녔다.
이젠 우리 가족 모두 떠나 아무도 없는 고향,
조부모님도 돌아가시고 이웃 할머니들도 모두 안 계신다.
1년에 한 번 성묘를 갈 때, 인사 다닐 집이 없다.
그저 고개 위에 올라서 멍하니 윗마을을 바라보는 일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다.
기억나는 대로 할머니들 “宅號(택호)” 하나하나씩 불러본다.
매정 할매, 창평 할매, 가둘 할매, 영주 할매...
배가 불러도 끝없이 음식을 들이밀던
정다운 할머니들 한 분 한 분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