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시절, 그러니까 1960~70년대 이야기다.
아버지는 박봉의 군속 공무원이셨다.
그 시절은 쪼들리게 살았지만 다들 함께
가난하게 사니까 별로 불편함은
느끼지 못하고 지냈던 것 같다.
모두 가난하게 살던 시절.
심지어 나라에 돈이 없어 쌀 등 현물로
공무원 급료가 나오기도 했던 시절이었다.
어머니는 조금이라도 궁핍에서 벗어나고자
부업을 하셨다. 동네 부인들과 함께.
'수출용 뜨개질'이라 불리는 부업이었다.
대장님은 한 동네 살고 있던
아버지 바로 밑 여동생 큰 고모님.
고모님이 어느 회사에서 수출용 뜨개질 일감을 받아와
희망하던 동네 부인들에게 나눠주는 역할을 하셨다.
오야? 오야붕? 대장님?
뭐 그렇게들 불렀다던가, 아니었던가, 모르겠다.
흠.
50년 전 이야기다.
개인적으로는 쉽게 살 수도 없는 고급 실을
산처럼 받아와 일정한 형태의 옷을 뜨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정해진 시간 후에 거둬들이고
생산량에 따라 성과급을 지급하는 방식이었다.
당연히 뜨개질 실력은 고모님이 가장 뛰어나셨고
우리 어머니는 두 번째쯤 되지 않았나 싶다.
낮에는 고모님네 집에 십여 분 가까이 모여서
하하호호 일을 배우고 함께 돈을 벌다가
저녁이 되면 소화할 수 있는 양을 나눠 들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신다.
어머니는 집안일과 함께
열심히 뜨개질로 약간의 돈을 버셨다.
가끔 다른 부업을 하는 부인들 앞에서
으스대기도 하신 것을 보면 수출 역군이라는
보람도 있으셨던 것 같기도 했고.
그랬다.
한창 일이 많을 때는
납기를 맞추기 위해
아이들과 눈 마주칠 시간도 없으셨으며
가끔 실 감기 등은 우리 같은 아이들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하셨다.
바쁘고 고단하시기도 하셨겠지만,
무척 재미있어 보이기도 했다.
지금 생각으로는 고단한 도시 생활 가운데
해방구 같은 역할을 뜨개질이 해 주는 것 같기도 했다.
대장 고모님 지휘하에 납기를 맞추고 나면
며칠 쉬었다가 다시 와르르…….
부작용으로 우리 아이들 옷은
팬티와 러닝만 빼고 죄다 뜨개질 양털 옷이었다.
돌려보내지 않아도 되는 자투리 실을 모아 만든
무겁고 까끌까끌한 양털 내복을
주야장천 입어야 하는 상상을 해 보시라.
토막 실을 이어 붙여서 잘도 만드셨다.
거의 십몇 년을 직업처럼 하셨고
이후에는 재미 삼아 쭉 하셨던 것 같다.
여든이 넘어서까지 가끔 손자 손녀를 위해
옷을 만들어 주시곤 하신 우리 어머니.
뜨개질 계에서는 앙드레 김 선생 못지않은
달인의 감각을 지니셨지만,
흐르는 세월은 어쩔 수 없어서
더는 우리 옷을 짜 줄 수 없게 되었다.
이제 구순에 접어드셨으니.
털 내복 입고 다닌다고 놀림도 많이 받았지만
근사한 505 외투를 입고 나타나면
아이들도 부러워하고 엄청 폼 났는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