꼰대 탈출

by 신화창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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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박석무 씨가 번역한 정약용 선생의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를 읽고 있다.

한 100페이지쯤 읽었을까.

주로 두 아드님께 보낸 편지인데

세심하며 인간적이고 구구절절 옳은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금세 졸음이 몰려온다. 진도도 잘 나가지 않는다. 분명 좋은 글인데도 말이다.


왜 이럴까.

‘현대 시조 쓰기’ 같은 작문 이론서는

난해하기 그지없어도 술술 잘만 읽히던데.


이러다가는 다 읽기까지 반달쯤 걸리겠다.

곰곰이 생각한다. 왜 이럴까, 왜 이럴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머릿속엔 딱 하나의 단어만 맴돌 뿐이다.


“꼰대”


선생께 죄송하다.

분명 좋은 말씀인데

이런 불경한 단어만 맴돌다니, 민망하다.


꼰대란,

권위주의적 사고에 젖은 늙은이를 뜻한다는데,

요즘은 젊은 꼰대란 말도 있단다.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이래라저래라 하는 말은 듣기 싫다는 뜻이며,

상대적으로 낮은 사람(듣는 사람)의 저항을 상징하는 말이다.


말하는 사람의 처지에서 생각해 봐도,

말의 “생산성”이 떨어질 테니 이런 식의 화법은 좋지 않다.

그런데도 "꼰대"들이 이런 비생산적인 화법을 유지하는 이유는

이미 몸에 배어 버려 바꿀 수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리라.


다행스럽게도 선생의 두 아드님은

아버지의 바람대로 율곡 같은 대학자는 되지 못했지만,

어느 정도의 성과를 내었으니 전혀 효과가 없었다고는 할 수 없겠다.

하지만 좋은 글의 내용만큼 화법에 신경을 더 쓰셨더라면

더 큰 효과를 보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누가 꼰대라는 말 듣기를 좋아하겠냐만

나는 그런 평을 듣지 않기 위해서 신경을 많이 쓴다.

분명 오랜 세월, 성과 지향의 생활을 해온 습관 때문이리라.


말이든 무엇이든 투입된 모든 것은

‘생산적이어야 한다’는 신념 같은 게 있다.

애써 한 말을 아무도 듣지 않는다면, 그것만큼 허무한 일도 없다.

그것은 낭비다.

춤을 추든, 생쇼를 하든 집중해서 듣게 하고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그런 “생산적인 말”을 좋아한다.


그렇게 되려면 우선 나이나 경험의 허울을 벗고

상대와 눈높이를 맞추는 게 중요하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내려다보면서 하는 말은 거북하게 들릴 수밖에 없다.

결론을 짓고 말하기보다는 고민을 먼저 말하고

함께 풀어가는 진정성 있는 태도가 생산성을 높인다.


“내 생각은 이런데, 네 생각은 어떠니?”


구석기 원시시대 동굴 벽화에,

“요즘 애들은 싸가지가 없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더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몸은 비록 젊고 늙고 차이가 있지만 모두 한때는 싸가지없는 세대였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 구는 사람의 말은

누구도 귀담아듣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고 있지만 나 역시 장담할 수 없다.

나 없는 어느 자리에서 꼰대로 낙인찍혀

맛있는 술안주가 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돌아보고 또 보고 할 뿐이다.


“ 얘들아! 나 꼰대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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