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상황에서도 병원은 큰 문제가 없이 돌아갔다.
난리가 나도 아픈 사람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고 병원은 적어도 겉으로는 조용했다.
문제는 당해 연도에 전문의 자격을 취득한 4년차 주치의 선생님들이었다. 취업 시장이 얼어붙었고 개업도 녹록치 않았다. 10년 이상 뼈 빠지게 공부했는데 갈 곳이 없다니. 그래도 우리나라 최고 대학을 나와서 최고 병원에서 수련을 마쳤는데 갈 곳이 없다니.
물론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대폭 줄었다는 것이 정답이었다.
무급 펠로우로 병원에 남아서 다음을 기약하는 선생님은 그래도 운이 좋은 편이었다. 그마저도 경쟁이 치열했다. 기대치를 대폭 낮춰서 가는 선생님도 있었다. 수년 동안 함께 지냈던 선생님들의 고민이 남의 일 같지 않았다. 그도 그런 것이 거의 대부분 나와 또래들이었다.
의대 6년, 인턴 1년, 군 복무 4년, 레지던트 4년. 꼬박 15년.
그 긴 시간을 가족과 함께 버텨내고 서른여섯, 꿈이 현실이 될 순간,
IMF.
보통 때라면 유수의 병원에서 서로 데려가려고 경쟁이 치열해서 선생님들은 고르고 골라서 가게 되는데 갈 곳이 없다니 당혹스럽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과 눈을 마주치기도 힘들었다.
수련 기간 동안 많은 것을 봤다. 공부 잘하는 자식을 서울에 보내 의사를 만들어놓고 어렵게 병원을 찾아와 속옷 보따리를 전해주던 부모님 모습, 어려운 살림에 용돈이라도 건네주면 민망한 표정으로 몇 번 사양하다 어쩔 수 없다는 듯 받아 넣던 흰 가운 입은 아들의 모습을 그대로 다 봤는데 어떻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었을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쭙잖게 위로를 하기라도 하면 얼마나 자존심이 상할까 걱정이 되어 입도 떼지 못했다. 병원 식당에서 우연을 가장해 밥값이나 계산해 줄까 했는데 그것마저 어려웠다. 어찌나 잘도 피해 다니시는 지.
시간은 무심히 흘렀다.
몇 개월이 지나고 어디어디 병원에 잘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얼마나 기뻤던 지.
지금은 어느 대학 병원의 원장님이 되고, 명의로 이름 날리고 계시는 그 때 그 선생님들이 자랑스럽다.
그 멋진 분들도 이런 시절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