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옛적 방학 때는요 (1)

by 신화창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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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문제는 ‘멀미’였다.

어머니의 뜻에 따라 방학만 되면 시골 본가에 가 있어야 했는데,

60년대는 도로 사정이 무척 좋지 않았다. 비포장도로, 자갈 길.

그래서 멀미는 필수였다.

거의 다섯 시간, 버스 안에서 사경을 헤매며 시골 터미널까지 가는 일,

그 시절, 어린 나를 말하기에 공포라는 표현만으로 부족하다.


지독한 멀미는 매일 버스로 통학을 해야 했던 중학교 시절까지 계속되었다.

멀미가 무서워 아무것도 먹지 않고 속을 비우고 겨우 도착한 시골 터미널.

내려서 걷는 추가 10 리는 천국이었다.

맑은 공기 마시며 고개 넘어 걷는 일은 오히려 즐거움이었다.

살 것 같았다.

차라리 교통수단이 없어서 100 리, 1000 리 걸어 다녔다던 그 옛날 조상들이 부러웠다.


산 넘고 물 건너 그렇게 고향 집 앞에 도착하면 콩밭에서 김을 매는 할머니를 만나게 된다.

“할머니!”

외침과 동시에 시력이 좋지 않았던 할머니는 대뜸 내 얼굴을 쓰다듬으시면서 울음을 터뜨리시곤 하셨다.

나는 아무런 대책 없이 할머니의 울음이 그칠 때까지 그대로 서 있을 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일곱 살 터울 막내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3대 독자가 될뻔 했던 장 손자가 왔는데 어찌 안 그렇겠는가.

충분히 이해했다.


국민학교 시절, 방학이란 방학은 언제나 산촌 고향 집에서 지내야 했다.

고요하고 적막한, 이웃이라고는 딱 두 집뿐인, 또래 아이도 없는.


고향 집은 전기도 없고 식수도 우물물로 해결해야 했다.

해가 떨어지면 무조건 자야 했다. 무료하고 심심한 시절이었다.

이렇게 말하면 고인이 되신 조부모께서 섭섭해 하시겠지만 내 느낌에는 말 그대로 유배 생활 같았다.


결코, 달가운 일정이 아니었지만, 순순히 받아들였던 것은 나름대로 어머니를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대도시 단칸방에서 방학을 맞이한 아이들을 다 돌보기는 힘들었을 테니까 말이다. 할머니가 특별히 귀애하는 장 손자 한 녀석쯤은 떼 놓아도 좋겠다는 생각을 왜 안 했을까. 가끔 바로 밑 동생을 보낼까 하고 시도를 해 보셨지만 새파랗게 질려서 가지 않으려 울며불며 버텨댔다.

동생이 야속했다. 하지만 이내 이것도 장남 된 의무라고 생각하고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 먼 경로를 아이 혼자 보낼 수 없으니 어른 한 사람이 동행하고 도착과 동시에 떼 놓고 바로 사라졌다. 그랬다가 방학 끝 무렵 와서 다시 데려갔다. 아무리 할머니가 귀애하신다지만 아이 처지에서는 얼마나 괴로운 일인가. 아무것도 할 일이 없었다. 그냥 빈둥빈둥 시간을 보낼 뿐이었다. 아무리 여름 낮이 길다지만 저녁 일곱 시에 반드시 잠들어야 했고 새벽같이 눈이 저절로 떠지는 날의 연속이었다.


넓은 마당을 지나 산 밑에 있는 변소는 왜 그렇게 멀고 무서운지 밤에 용변이 마려우면 어쩔 줄 몰라 했다. 작은 것은 요강으로 해결한다지만 큰 것은 어찌하겠나. 불도 없는 밤중에 마당을 가로질러 산 아래 있는 변소가 왜 그렇게 멀기도 한지,

게다가 변소 다리는 왜 그렇게 넓은지 아차 잘못하면 풍덩 빠질 수 있다.

할머니는 아무 데나 싸고 오라지만 어디 그럴 수야 있나. 매일 밤이 고역이었다.

그래도 일주일쯤 지나면 대강 적응이 된다.


그때부터 비로소 고향 집의 좋은 점이 보이기 시작한다. 밤하늘에서 쏟아지는 별 무리에 의지해 이웃 마을에 다녀와도 무섭지 않고, 텃밭의 토마토, 산기슭 천도복숭아, 전부 내 차지다.

이 모든 게 도시에서는 언감생심이다. 조그마한 먹을거리 하나가 생겨도 많은 형제와 피 터지는 경쟁을 해야 하는데 적어도 한 달 동안은 내가 독존적 왕이었다.


그래도 내가 아주 많이 심심해하면 할머니께서 이웃 마을에 가서 아이 몇을 잡아 오신다.

아주 가끔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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