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1월, 내 생애 첫 월급을 받았다.
하얀 봉투에 담겨 손에 쥔 27만 원. 그 순간의 벅참이란.
책정 금액 33만원 중 수습 급여로 27만 원. 그 시절 삼성전자 대졸 신입사원 급여가 38만 원쯤 했으니까 그리 박한 대우는 아니었다. 당시는 연봉 어쩌고 하는 개념은 없었다. 그냥 월급 얼마 그렇게 말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대졸 사원의 당시 급여 수준은 대기업 35~38, 중견 기업 30~33, 소기업 25~27만 원 정도였으니 난 선방했다고 생각했다(지금 대졸 초봉 수준이 월 350 정도니까 당시의 물가 수준은 현재의 10분의 1정도라고 보면 된다).
막상 첫 월급을 받은 뜨거움이란.
멀리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와 신입사원 교육을 마친 후 받은 첫 봉급. 태어나서 처음으로 받은 월급! 봉급! 급여! 하얀 봉투의 겉면에는 내역이 적혀있었고 동전 한 닢까지 담아져 있던 사랑스런 자태의 첫 월급 봉투였다. 뭐든지 ‘첫’이라는 말이 들어가면 느낌이 남다르지만 첫 월급의 감격은 더욱 남달랐다. 세상에 나와 스스로의 힘으로 처음 번 ‘신성한’대가였다. 뭔가 인정받은 느낌이랄까. 뿌듯한 느낌이랄까.
세고 세어 봐도 지겹지 않았다. 새어나오는 웃음도 감출 수 없었고.
월급을 봉투에 담아 받는 경험은 이후 2~3년 유지되다가 송금으로 바뀌었는데 어떤 동기는 너무 아쉬운 나머지 봉급날, 은행에서 10원 짜리까지 몽땅 찾아서 다시 봉투에 담아서 가져가는, 어쩌면 좀 바보 같은 짓을 한동안 하기도 했다.
우선 후불제 하숙비 10만 원 지불하고. 엄마 빨간 내복 사고. 본가에 10만 원을 보냈다. “대학까지 지원해주시느라 감사했습니다!”
엄마는 장남이 선물한 내복을 받아들고 울었다. 어려운 집안의 맏며느리로서 부모 봉양, 자식 교육, 얼마나 수고하셨는지 그 의미를 내가 모르면 되겠는가.
그러고 나니 남는 게 없었다.
하지만 내겐 희망이란 비장의 무기가 있었다.
‘그래, 당장은 쪼들리지만 3개월이 지나 수습이 해제되고 정식 월급 33만 원을 받으면 훨씬 나아지리라.’
봉투에 가득 담긴 그 돈의 가치. 세상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그렇게 38년을 향한 첫걸음을 내딛었다. 아주 힘차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