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그렇게 별 탈 없이 열 달이 지나고 드디어 출산이 임박했다.
아이는 처가가 있는 안동에서 출산하기로 했다.
양가 어른들의 요구가 있기도 했거니와 산후조리를 위해서도 그게 더 좋을 것 같았다.
별수 없이 우리 부부는 잠시 이산가족이 되어야 했지만 기쁜 마음으로 그렇게 결정했다.
다만 열 달 동안 정성껏 돌봐 주신 박기준 산부인과 원장님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다행히 원장님께서도 그게 좋겠다고 말해주시고 여러 가지 조언을 해주셨다.
감사했다. 정말 친 형님 같은 분이셨다. 거래 관계가 아니더라도 따듯한 배려가 느껴졌다.
1990년 11월 3일, 결혼 1주년 기념일을 이틀 남겨두고 딸아이가 태어났다.
그 소식을 회사가 있는 안양에서 나는 들었다.
그때만 해도 회사 내에서 쫄병 신세를 못 면하고 있었던 관계로 자기 결정권이 전혀 없었는데 고맙게도 선배 여러분께서 빨리 내려가라고 말씀해주신 덕분에 다 저녁때지만 출발할 수 있었다.
안양에서 청량리로, 다시 안동으로.
꽤 긴 시간이었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어떻게 생긴 아일까. 딸아이인데 못생겼으면 어떡하지? 아이를 만나면 어떤 기분일까. 우리가 잘 키울 수 있을까.
복잡하고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시간은 더디게 흘러갔다.
안동역에 도착하니 이미 어두운 밤이 되어 있었는데 뜻밖에도 장인께서 마중을 나와계셨다.
그때까지만 해도 장가든 지 얼마 안 되고, 말씀도 별로 없으신 분이라 무척 어색하게 대하고 있는 관계라서 조금 어려웠다.
장인의 한걸음 뒤에서 묵묵히 병원을 향해 걸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딸이네.” 아주 짧은 한마디였다.
“네”
이미 알고 있었다는 말씀은 못 드렸다.
혼날까 봐.
‘왜? 불경스럽게도 장인이 귀엽지?’
미안해하시는 것 같았다.
속으로 말씀드렸다. ‘아니에요! 좋기만 한걸요!’
그런 시절이었다.
딸이 뭐 어때서! 난 좋기만 한데. (지금 난 시커먼 아들놈보다 딸이 더 좋다)
얼마나 신기방통한 일인가.
내가! 아니 우리가! 아이를 낳다니!
아내는 초산이었지만 장하게도 큰 어려움 없이 순산을 했단다.
나중에 들어보니 힘이 너무 들어서, 또 소리 지르기 싫은 나머지 베개를 반쯤 먹은 것 빼고는 큰 에피소드도 없었다.
(아마 조선 시대였다면 열 명은 낳았을 거야.)
그날 밤은 병원 아내 옆에서 잤다. 아이는 그다음 날 상봉했으며(요즘은 바로 보여준다는 데 그때는 그랬다. 하루에 두 번 면회 시간만, 창문 너머로 잠깐)
하루를 기다려 처음 만난 “권 애기”양은,
3.5kg 건강한 아기라는데 내 눈에는 왜 그렇게 쪼그마한지, 얼굴은 왜 그렇게 까만지, 왜 그렇게 울어대는지, 예쁘기도 했지만 불쌍하다는 생각은 왜 드는지. 보통 아기들은 머리카락이 별로 없이 태어난다는데 우리 아기는 벌써 장발이었다. 하~~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내가 아빠가 된 건가?
사전에 성별에 대한 정보가 없었던 어른들의 반응은 아이를 예뻐하시기는 했지만 섭섭하심이 역력했다. (아버지께서는 딸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주무시러 가셨다고 함, 여덟 시도 안 되었는데)
처가 쪽 어른들은 괜히 미안해하시고 말이다. 요즘 애들은 도저히 이해를 못 하겠지?
그때는 그랬다. 그렇지만 섭섭함은 아주 잠깐이었고 이후 내내 물고 빨고 해주셔서 참 다행이었다.
그렇게 1990년 11월 3일 토요일 안동 성소 병원에서 딸이 태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