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년 전 10월의 마지막 밤이었다. 1984년 10월 31일 밤.
나는
강원도 최북방 화천의 꼭대기, 적과 마주 보고 있던 그 지점 초병이었다. 이제 갓 상병을 달고 GOP에 올라갔으니 14개월쯤 되었나 보다.
지나온 군 생활도 남은 군 생활도 엇비슷해진 지점이었다. 그 부대는 우리 부대가 아니었다. 우리는
부족한 경계 인력을 잠시 메우려 100리쯤 행군해 올라간 지원 부대 소속이었다.
불빛이 휘황찬란하다.
강원도 높은 산맥을 따라 철책이 굽이굽이 한강 변 가로등처럼 밝다.
낙엽 소리 우수수 초병을 더욱 을씨년스럽게 한다.
함께 올라간 현지 병사는 말이 없다.
어디선가 대북 방송은 적의 선무방송을 제압하고 내 귀를 때리고 내 가슴에 박힌다.
이 노래는 우리가 아는 노래다.
“잊혀진 계절”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이렇게 시작하는 노래다.
스물넷이 저물어 간다.
무언가가 그립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고 가슴 뛰기도 했던 젊은 밤이었다.
아깝다.
그림처럼, 서사시처럼 어디에다 남겨두고 싶었다.
생각해보면, 대단한 사연이 있지도 않고 가슴 뛸 일도 없지만, 그저 이유 없이 아쉽고 그립고 쓸쓸했다.
차라리 대단한 사연이라도 있었더라면. 아니, 이미 묻힌 사연을 부인했다.
대단찮았다고. 애써.
이 느낌은 결코 나쁘지 않다.
살면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고, 또 못 할 그 느낌.
이걸 어디다 새겨둬야 하나.
인생은 말이다.
꼭 극적일 필요도, 서사적일 필요도 없다.
한 편의 운문으로, 한 편의 그림으로도, 기억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가 있다.
그 가을밤은 내 평생 최고의 선물이었다.
그런 밤이 있었다.
1984년 10월 31일, 강원도 화천 꼭대기에서 뼛속 깊이 새겨진 그날 밤의 그림을 다시 꺼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