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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美學)

by 신화창조

아름다움.


정의하기로 예술의 영역에 속하는 아름다움이란

공감하면 예술이요, 그렇지 않으면 본질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예술은

주관적인 영역이다.

다소 단정적이라도 이해해 주시기 바란다.


그것이 문학이든, 미술이든, 사진이든, 음악이든 삶이든 말이다.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기준은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다를 수 있으므로,

다르다고 해서 편견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어쩌면 달라서 더 존재 가치가 있는지 모르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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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개성, 나의 예술, 나의 기준.

(철저한 취향이니까, 너무 편견으로 몰아세우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우선 공감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나에게는

너무 Nonsense 해서는 곤란하다. 내 공감이 중요하다.

가진 뜻을 모르는데 남들이 그렇다고 하니까 인정한다는 논리는 있을 수 없다.

내겐 가치가 없다.

어렵지 않아야 한다. 문학이든 뭐든 난해해서는 안 된다. 설명 가능해야 한다.


순수해야 한다.


사회적 흐름에 치우쳐 본래의 깊이를 잃지 않아야 한다.

난 순수 문학을 사랑한다.

참여 문학을 배타하지는 않으나 그래도 순수 문학이 진정한 예술이라 믿는다.


詩도 마찬가지다.

비분강개하거나 조롱이 강한 글보다, 단어 하나하나를 고민으로 정제한 순수시를 사랑한다.

그런 시를 만들어 낸 시인들을 사랑하고 섬긴다.

참여적 의미를 순수시의 영역까지 승화시킨 시인도 좋아한다.

한 개의 단어를 선택하기 위해 코피를 쏟으며 며칠 밤을 새운 어느 시인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진정한 예술은 그런 것이다.


음악이나 미술도 그렇다.

그림 한 점을 만들기 위해 한겨울 내내 난방도 없이 細筆 붓으로 사다리에 올라 그림을 그리던 어떤 미술가를 본 적이 있다. 그렇게 그림 한 점이 나왔다.

누가 알아주든 말든 스스로 인정하고 타인의 공감을 얻는 것.

이것이 예술이다.

이름으로 얻는 포장된 예술이 아니라 그 자체의 가치.


나는 무척 운이 좋은 사람이다.

美學에 눈을 뜰 수 있도록 큰 영향을 주신 두 분 선생님이 계셨기 때문이다.

물론 그 선생님들은 나를 기억 못 하실지도 모른다.

나는

눈에 띄는 학생이 아니었다.

수백 명 아이 중 하나, 갯가 돌멩이처럼 흔한 아이였다.

문학으로 도광의 선생님. 미술로 변종곤 선생님.


나는 사진하는 아이였다.

그러나 내가 사진을 내려놓고 문학을 하든, 미술을 하든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그들이 내게 알려주신 걸 생각해보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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