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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두소이 Feb 10. 2020

02 이원론의 영향 1

새 하늘과 새 땅

  앞서 정리한 비전, 사명 그리고 사역이라는 용어는 서로 혼용되거나 다른 용어들과 섞여서 쓰이곤 한다. 이러한 주된 원인은 교회 안에 역사적으로 뿌리 박힌 이원론의 영향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원론의 영향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한다.

  기독교 세계관에서 이원론이란 쉽게 말해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을 구분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목회자들을 “성직자”라고 부른다. 다시 말해 종교적인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일은 “거룩한 직무”로 그 외 일은 “세속적 직무”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이 좋고 정말 헌신된 사람들은 목사나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들을 갖고 있다.

  이러한 이원론의 영향은 초대교회 베드로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베드로가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를 만나기 전 보자기 같은 그릇이 내려오는 환상을 본다. 그 그릇 안에는 구약에서 부정한 짐승으로 분류됐던 동물이 나오는데 베드로는 잡아먹으라는 음성에 속되기 때문에 먹을 수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성경은 두번째 소리로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행10:15)고 기록하고 있다. 다른 곳에서도 성경은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다”(딤전4:4)고 기록하고 있으므로 세상을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으로 구분하는 이원론은 성경적이지 못한 것이다.

  종교적인 것을 떠나서 최근 화두가 되는 워라밸(Work-Life Balance)에 대한 내용만 보더라도 우리는 이원론의 영향을 알 수 있다. 워라밸은 “일과 삶의 균형”이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우리가 일과 삶을 구분함에 따라 일은 삶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으로 마치 삶에 대치되는 부정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 또한 우리는 여가시간을 통해서만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가 하루 일과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일터가 삶에서 배제되니 우리의 인생이 참 불쌍하기 그지없다.


이원론 vs 이중성


  우리는 이원론과 이중성을 혼동해서는 안된다. 리차드 미들톤과 브라이안 왈쉬 공저인 “그리스도인의 비전”에서 이중성에 대해서 “우리는 주님을 섬기든지, 아니면 우상을 따르는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추가적인 설명이 없어 좀 아쉽지만 이중성이란 분명한 구분이 있다는 것으로 선과 악, 순종과 불순종과 같이 명확하게 구분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원론은 중립적인 것을 부각되는 어느 한가지 특성으로 오해하는 일종의 인식의 오류이다. “식칼”을 예로 들어보자. 식칼은 음식 재료를 자를 때 사용하는 우리에게 유익을 주는 도구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누군가 “식칼”로 살인을 저질렀다면 “살인무기”가 될 수도 있다. “식칼”은 본래 용도인 요리도구임에도 불구하고 살인에 쓰인 적이 있다고 해서 누군가 “식칼”을 총기류처럼 관리하자고 한다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러한 중립적인 것들은 어떻게 사용되는냐에 따라 좋은 것일 수도 나쁜 것일 수도 있다.

  골로새서에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골3:1,2)” 라는 말씀이 있다. “위엣 것”과 “땅엣 것”으로 명확한 구분이 있다. 이 말씀은 어떻게 해석될까? 이원론에 입각해서 보면 “위엣 것”은 하늘, 영적인 것 등을 의미할 것 같고 “땅엣 것”은 세상, 육적인 것 등으로 해석하기 쉬울 것 같다. 하지만 이 말씀은 이중성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5절에 이렇게 명시되어 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3:5)

  “그리스도인의 비전”(앞의 책)에 따르면 이원론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삶의 다른 부분들을 무시하고 희생시킴으로써 피조된 삶의 어느 한 측면을 부당하게 격상시키는 것은, 그 효과에 있어서는 우상 숭배의 한 형태”가 되기 때문이다. 이는 “복음을 삶 전체와는 무관한 것이 되게 한 것”이고 “이것은 바로 역사의 영역, 모든 일의 시간적 영역으로서, 이 영역으로부터 하나님은 배제된 것”이라고 한다.


“카톨릭적 왜곡”과 “개신교적 왜곡”


  오스 기니스는 “소명”이라는 책에서 “카톨릭적 왜곡”과 “개신교적 왜곡”에 대해 설명한다. 그는“카톨릭적 왜곡”이란 영적인 것을 격상시키고 세속적인 것을 희생시킨 것이라 설명하며 “개신교적 왜곡”은 그 반대로 영적인 것을 희생시켜 세속적인 것을 격상시킨 것이라고 설명한다.

  카톨릭에서는 세상과 단절하여 수도사, 수녀가 되는 것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한다. 이는 불교의 수도승들과 큰 틀에서 다를 바가 없다. 수련과 금욕 등을 통해 믿음이 자랄 수도 있지만 반대로 자기의를 높이려는 마음이 들 수도 있다. 마지막 심판 때에 하나님께서 판단하시는 기준은 각자가 처한 환경 속에서 얼마나 하나님을 신뢰하며 믿음으로 동행하였는지를 보실 것이다. 구약에 나오는 죽지 않고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믿음의 선배 중 하나인 에녹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기록한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5:24)

  개신교적 왜곡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최상의 명백한 청교도 사상은 일차적인 소명(‘하나님에 의한, 하나님을 향한, 하나님의 위한’)을 이차적인 소명(‘모든 이가, 모든 곳에서, 모든 것에서’)으로부터 분리시킨 적이 결코 없었다.” 하지만 종교개혁가인 칼빈은 소명과 일(비합법적인 일을 포함)을 거의 동일시한 것으로 보았고 이렇게 잠재되어 있던 소명에 대한 불균형이 점차 자라나서 청교도 시대에는 완전한 왜곡으로 귀결되었다고 말한다. 결국 일, 직업 등이 소명이라고 여겨졌고 그 일과 직업이 부패함에 따라 일부 개신교 그룹에서 “소명의 철폐”를 요구했다고 한다.


천국에 대한 이원론 “데려감” vs “버려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8)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 하리니 이들은 너희 손에 붙이웠음이라”(창9:1,2)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말씀은 인간이 죄를 짓기 전후 모두 동일하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문화대사명”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종교적인 것에 국한되지 않고 세상 문화에도 적용됨을 보여준다. 오늘날 기독교의 문제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원론의 폐해로 인해 복음을 종교 안에 가두어 복음과 세상을 무관하게 만듦으로써 복음이 세상 속에서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되도록 방치해 버린 것이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마지막에 없어질 것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 (벧후3:13, 계21:1)으로 새롭게 될 것이다. (계21:5상)

  이에 대한 근거로 마태복음 24:36-41을 살펴보자. 이 말씀은 번역의 문제 때문인지 전통적으로 마직막 때 구원받은 성도들의 휴거에 대한 말씀으로 설명되곤 한다. 이 말씀에서 두 종류의 사람이 나오는데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라고 나온다. 누가 봐도 버려둠을 당한 자가 구원받지 못한 자로 해석되기에 충분해 보인다. “버려둠” 대신에 “남겨둠”이라든지 다른 용어로 번역되었으면 다른 해석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을지 모르겠다.

  “그리스도인의 비전”은 바로 이와 반대되는 새로운(?) 해석을 소개한다. 39절에서 “…멸하기까지…”에 대해 영어로 직역하면 “데려가기까지(took)”로 번역된다는 것을 근거로 데려감을 당하는 사람들이 “불순종을 고집하면서 구원의 복음을 무시한 사람들”이라고 한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성경의 미래관은 피조 세계의 회복이며, 또한 주님 앞에서의 우리의 피조물로서의 삶의 회복임”을 강조한다. 즉 마지막 때에 이 세상은 새롭게 되고 구원받은 성도들은 이 세상에 남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휴거를 믿는 사람들처럼 이 세상을 없어질 것으로 보는게 아니라 새롭게 될 것으로 보기 때문에 이 세상을 향한 문화사명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한다. 우리가 우리의 구원과 소망하는 천국에 대해 깊이 이해한다면 이러한 새로운 해석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칭의로 시작하여 성화, 영화의 단계를 거친다. 우리가 영화의 단계에서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고전15:51)할 것이다. 성경은 우리의 변화될 몸, 부활의 몸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그래서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고(고전15:20)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 가야 하므로(엡4:13) 부활하신 예수님을 살펴보면 우리가 변화될 몸에 대해 유추해 볼 수 있다.

  첫째 예수님은 육체를 지니고 계신다. “저희가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24:37-39) 그리고 생선을 드셨다.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매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눅24:42,43)

  둘째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의 몸과 동일하지만 약간 달라지셨다. “도마에게 이르되 네 손가락을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20:27) 즉 십자가의 흔적이 예수님의 몸에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아 십자가에 달리시던 바로 그 몸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으나 바로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약간 달라지셨다.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줄 알아보지 못하거늘”(눅24:16)

  셋째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몸이시다.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요20:19)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20:26)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부활하여 얻게 될 영광스러운 몸이 현재 우리의 몸이 사라지고 완전히 다른 몸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몸이 홀연히 변화하여 새롭게 될 것으로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부활의 몸으로 살게 될 천국은 여전히 공간으로서 표현된다.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3:13) 이 말씀 만으로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지금의 세상과 완전히 다른 것인지 아니면 기존의 세상이 새롭게 되는 것인지 판단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기존의 세상이 새롭게 되는 것임을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구속하심은 우리 인간뿐만 아니라 피조된 이 세상에도 적용되기 때문이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대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롬8:19~22)

  그렇다면 결국 창조 이후 인간이 죄를 지음에 따라 저주받고 오염된 이 세상도 구원의 성화와 같은 과정을 거쳐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변화하진 않을까?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이후에 성령의 내주하심을 따라 성화되어 우리의 인격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자라가야 하는 것처럼 이 세상도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가 전 분야에서 – 정치, 사회, 경제, 예술 등 – 점점 인정되고 확장되도록 우리가 노력해야 하진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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