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한 강사 목사님이 주일 예배 시간 중에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준비하는 교회의 대안에 대해서 설교를 하셨다. 그 내용은 수직적 구조에서 수평적 구조로 전환하고 “목사” 중심의 교회운영이 “목자” 중심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좋은 지적인 것은 분명하지만 이러한 대안이 과연 새로운 시대에 교회가 살아남기 위한 전략으로 새로운 것일까?
혹자는 초대교회 당시 사도들이 존재하여 마치 수직적 구조가 처음부터 존재했다고 말할 지 모르겠다. 하지만 마태복음 28:18-20절의 “제자 삼으라”는 지상대명령을 듣는 “너희가” 당시 그 자리에 모인 자들만을 해당되는 것이 아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도 포함되는 말이라면 교회 안의 직분은 무엇이든 - 목사든 장로든 집사든 - 자연스레 수평적 구조로 갈 수 밖에 없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목사”는 성경에 나오는 다양한 “은사” 중 하나(엡4:11)로 언급될 뿐 오늘 날의 교회처럼 교회 안의 수직적 구조의 “정점”에 위치한 게 아니다. 성경은 특권의 독점을 경계하는데 역할 - 선지자, 왕, 제사장 - 구분이 명확했던 구약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구약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 “만나”만으로 만족할 수 없어 “고기”를 달라고 불평하는 장면이 나온다. (민 11:5~9) 이에 대해 모세는 괴로워하며 백성을 혼자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감에 사로잡혀 불평한다. (민11:10~15) 하나님은 그 불평하는 기도를 들으시고 “장로와 유사” 칠십인에게도 “모세에게 임한 신”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며 동시에 “고기”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민11:16~20)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모세에게 임한 신”을 칠십인에게 주셨고 (민11:25) 그 과정에서 엘닷과 메닷에게도 신이 임하여 예언을 하게 된다.(민11:26) 이에 대해 여호수아가 시기하여 모세에게 “금하소서” 라고 요청한다. (민11:28) 모세는 이렇게 대답한다. “여호와께서 그 신을 그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민11:29). 이는 요엘 선지자의 예언과도 일치한다.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욜2:28)
이러한 여호수아와 같은 시도는 신약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요한이 여짜오되 주여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하시니라 (눅9:49, 50)
구약에서 또 하나의 예를 찾을 수 있는데 바로 왕이었지만 예언까지 했던 사울이다. 사울이 다윗을 쫓을 때 다윗은 사무엘이 있는 라마 나욧으로 도피한다. (삼상19:18) 사울이 이 소식을 듣고 다윗을 잡으러 사자들을 보내고 이들에게도 하나님의 신이 임하여 예언을 한다. (삼상 19:19, 21) 그래서 사울이 직접 찾아가게 되지만 결국 사울도 하나님의 신이 임하여 예언을 하게 된다. (삼상19:22, 23) 사울은 왕이었고 예언은 선지자의 역할이었다. 즉 왕과 선지자의 역할이 겸해진 사건이다. 이는 매우 중요한데 예수님을 예표하는 구약의 세가지 주요 역할 - 선지자, 왕, 제사장 - 이 신약에 와서 통합되기 때문이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벧전 2:9)
집사의 역할
초대교회 “집사” 역할이 생겨나게 된 배경을 살펴보자. 사도행전 6장을 보면 초대교회가 점점 성장하면서 구제 대상에서 일부 사람들이 누락되는 일들이 발생하게 되어 12사도와 모든 제자가 모여 이 문제에 대해 논의를 하게 된다. (행6:1~4) 그리고 일곱 집사를 선택한다.(행6:5) 여기서 역할이 구분되는데 12사도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행6:4)으로 일곱집사는 공궤를 일삼는 것(행6:3)으로 나뉘어 진다. 이를 근거로 혹자는 말씀과 기도는 목사의 역할로 그 외 행정, 구제 등의 일, 즉 교회봉사에 해당하는 일들이 오늘날의 집사들의 역할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기도와 말씀은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것이지 결코 사도의 전유물이 될 수 없다. 다만, 사도로서의 사명, 즉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행20:24) 했기 때문에 기도와 말씀에 “전무”하고자 했던 것이다. 일곱 집사의 자격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인데 이 중 하나인 빌립은 전도자였고 (행21:8), 스데반은 집사임에도 순교 직전 구속사적으로 매우 중요하고 의미있는 설교를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행7장) 그리고 입곱 집사를 세우고 난 후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게” 되었다. (행6:7) 결국 집사를 세운 목적은 초대교회가 마태복음 28장의 지상대명령을 효율적으로 성취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수직적 구조 즉 계층화, 계급화하려는 시도는 성경적이지 못하다. 제자들은 몇 차례 누가 큰지 그리고 중요한 자리에 대해 다툼을 했고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답하셨다.
“저희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이가 큰 자니라” (눅9:48)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막10:42~45)
가장 작은 이가 큰 자이고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섬기고 종이 되어야 큰 자가 되는 역설 중의 역설이다. 즉, 위아래가 없고 서로 섬길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5:21)고 한 것이다.
나는 어릴 적 종교성이 참 많았다. 비록 모태신앙은 아니지만 어머니를 따라 새벽기도에 나가고 “방언” 받게 해 준다는 개척교회에 별도로(?) 다니며 고등학교 시절 대학가기 위한 공부를 할 때 꼭 성경을 읽고 시작하곤 했다. 그래서 누구보다 신앙이 좋다(?)는 착각에 빠지기도 했었다. 그리고 대학생이 되면서 학생선교단체를 통해 성경 말씀을 깨닫게 되고 그에 대한 사모함이 매우 강렬했던 경험을 잊을 수가 없다. 한때였지만 정말 신학교를 가야 되는 건 아닌지 고민했던 적도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교회에서 설교는 목회자들만 할 수 있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간증과 사례 또한 목회자가 되는 것에 초점이 있었다 보니 “하나님의 일”은 곧 “목회자가 되는 것”의 등식이 성립하게 된 오류를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다. “소명”의 저자인 오스 기니스도 후술할 “윌리엄 윌버포스”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신학교로 갈 뻔한 경험은 이를 잘 반증해 준다.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탈피하기 위해서라도 좋은 롤모델이 필요하다. 나는 앞에서 살펴본 일곱 집사처럼 자신의 전문성을 가지고 현장에서 목회자 못지 않은 기도와 말씀으로 사역하는 본이 되고 싶었고 신앙이 좋으면 신학교에 간다는 공식을 깨고 싶었다. 그래서 비록 목회자가 될 생각은 없지만 성경을 열심히 읽었고 관심있는 많은 신앙서적 또한 탐독했다. 그와 동시에 “목회자”가 아닌 내게 주어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면서 결국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아직까지도 롤모델이 되기엔 턱없이 부족하지만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고 있다.
나는 신학교는 “목사의 은사” (엡4:11)나 “예언(말씀증거)의 은사” (고전14:3) 가 있는 사람들이 지원하고 양성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목사님들이 설교를 하지 않을 수 없는 한국교회 구조 속에서 여러 목사님들이 설교에 자신 없어 하면서 목회자로서의 자존감이 매우 낮은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그리고 여전히 말씀은 목사님들의 일인양 생각하는 성도들의 목사님들에 대한 기대로 목사님들은 더욱 부담을 가질 수 밖에 없다.
교회가 기존 질서에서 탈피하여 수평적 구조로 가려 한다면 아래로부터의 “평신도운동”이든 어느 교회 목사님이 말씀 하신대로 기존 교인을 등록받지 않고 오리혀 기존교인을 훈련 양성하여 파송하든 종교개혁만큼은 아니더라도 이러한 개혁적인 움직임이 필요하다. 앞서 이야기한 대로 초대교회가 사도와 집사의 역할을 나눈 것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제자 양성-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함이었다. 오늘날의 한국 교회가 이러한 초대교회의 모습을 따라간다면 목사님들이 기도와 말씀에 전무할 수 있는 구조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제자를 양육”하는 체제로 바꾸어야 하며 분주하게 만드는 일부 프로그램이나 좀 더 좋게 보이기 위한 형식들을 새롭게 정리해야 한다. 집안일 하느라 분주했던 마르다의 불평에 예수님은 “…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눅10:41,42)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