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어릴때) 초절식다이어트를 해본 적이 있다. 당시 식단 스타일은 어떤 요리든 야채와 뭍은 양념을 메인으로 먹고 면이나 밥은 살짝 맛만 보는 식이었다. 요즘 유행하는 다이어트 명명법으로 이름 붙이면 저탄 양념식 정도 되겠다. 거의 한끼도 채 안되는 식사량으로 하루를 버티니 몸은 확실히 야위었고 뭔가 해낸듯한 성취감이 생겼다. 음식 앞에서 단호하게 No라고 외치면 웬지 강인하고 의지력이 넘쳐보인다. 남들은 식욕참는게 그렇게 어렵다는데 쉽게 해내는걸로 보아 내 의지력이 남들보다 강한줄 알았다.
하지만 식욕전투에서 승리는 오래가지 않았다. 1년이 지나고 이제 조금 더 먹어도 되겠지하고 양을 늘인게 봉인해제의 시작이었다. 머릿속에 음식이 떠다니기 시작하더니 앉으나 서나 자나깨나 하루종일 먹는 생각만하게 되었다. 넘칠것 같은 의지력이 소진되자 한순간에 식욕의 노예가 되었고 우월감은 당황스러움으로 바뀌었다.
의지력도 근육처럼 아주 강하게 태어나거나 운동과 훈련을 통해 강해지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의지력은 근육보다 돈에 더 가깝다. 돈을 흥청망청 써버리면 다시 월급때까지 빈곤하게 지내야하는 것과 너무나 흡사했다. 돌이켜보면 당시 1년간 다이어트의 승리는 내 의지력이 남들보다 강해서라기 보다 미래에 할당된 의지력을 대출하듯 땡겨왔기 때문이었다. 한껏 끌어모은 의지력을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배틀에 탕진하자 난 식욕앞에서 무참하게 패배했다. 그뿐아니라 조금이라도 참고 견뎌야하는 일상의 일들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다. 의지력을 함부로 남발하면 안된다는 걸 모르고 겪은 혹독한 인생경험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다행히 시간이 걸리긴했지만 올바른 식생활 습관을 가지게 된 지금은 초절식때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을 먹지만 몸무게는 크게 증가하지 않고 건강하다. 현재의 식단이 완벽하지는 않아도 더이상 음식과 무모한 대결을 하며 의지력을 낭비하지 않는다. 인생에는 의지력이 필요한 일들이 한두가지가 아닐 뿐더러 심지어 행복해지는데도 의지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오늘은 한정된 자원인 의지력을 효과적으로 배분해 쾌락과 고통을 조율하는 방법을 얘기하고자 한다.
난 중독자다
나에겐 적당히라는 말이 제일 어렵다. 한번 짜릿한 즐거움을 느끼면 적당히 끊질 못하고 하얗게 불태울때까지 가버린다. 예외적으로잘 참는영역은의지력을 한곳에 몰빵해 얻은 결과였다. 의지력을 할당하지 못한 나머지 영역에서는 불안정한 본성이 드러났다. 남들에게 평생 숨겨온 쉽게 낚이는 본성말이다.
과자에 빠져 절제없이 직구하는 행태
내가 낚이는 영역은 무척 다양한데 먹거리로는 과자, 빵 아님 떡같은 디저트류 볼거리로는 유튜브, 넷플릭스, SNS(인스타)... 셀 수 없다.
원래는 담배와 술도 이 유혹 리스트에 있었다. 내가 뭔가 강한신념이 있어 이들을 이겨낸 것은 아니다. 정기적 흡연자가 되지 못한 것은 사회적 위치(?) 덕분에 지붕없는 공공장소에서 떳떳하게 흡연할 수 없었고 실내흡연은 법적으로 금지되어 더욱 불가능하기때문이다. 내가 담배피면 견디지 못하는 사회적 관습 "덕"을 좀 보았다.
술꾼이 되지 못한 것은 내 저질스러운 체력 때문이었다. 술을 많이 마시는다음날 정신적 우울감과 육체적 고통이 너무 커서 다시 마실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어쩔수 없이 멀어진 술과 담배를 제외한 나머지 유혹들과는 아직도 지리멸렬한 싸움이 지속되고 있다. 의지력이 있을때는 억눌렀다가 피곤하여 의지력이 줄줄 세나가면 다시 손대기 시작해 정신차리면 하루종일 그것만 하고 있다.
아기영역까지 침범하는 과자 욕심
중독의 기준
과자를 자주 들먹이지만 과자가마약이라고 매도하는 것이 아니다. 과자는 누군가에겐 있으면 먹고 없으면 마는 간식일 뿐이지만 한봉을 다 비우고도 멈추지 못하는 나에게는 중독적인 음식이다. 중독을 판가름하는 기준은 물질의 종류나 양이 아니라 자기조절능력의 상실이다.
커피를 예로 들면 난 하루 한잔만 마신다. 하지만 커피 카페인의 각성작용과 기분이 좋아지는 약발이 나에게 너무 잘 받는다. 그 기분을 잊을 수 없어 같은 한 잔이지만 250ml 숏에서 300.. 350 톨, 그란데로 슬금슬금 올라 간다. 그러면 여지없이 손이 떨리고 심장이 두근대고 급기야 잠을 못자 밤새 뒤척인다. 그렇게 잠을 못자 피폐해진 다음날은 커피가 더 절실해진다. 커피가 날 살려주는 듯하지만 애초해 날 피폐하게 만든게 커피였다. 이 모든 악순환을 알면서도 커피없는 하루가 두렵다고 느낀 순간 중독이라고 시인할 수 밖에 없다.
누워서 해드폰보는 깐깐징어
유튜브 알고리듬에 낚여 넋을 놓는 모습이 한심하다고 느낀 날 밤에도 결국 지루함을 이기지 못해 누워서 핸드폰을 찾는 내가 뉴스에 나오는 약물 중독자들과 무슨 차이가 있는지 고민하게 된다. 유혹의 매개물만 다르지 멈춰야 하는 순간 멈추지 못하고 끌려다니는 모습은 같다.
쾌락을 불러 일으키는 대상은 모두 달라서 누군가는 술이나 과자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유튜브 영상이 혹은 포르노가 감각을 자극할 수 있다. 어떤 것이 되었든 고통을 느끼면서도 제대로 브레이크를 걸지 못하고 끌려다니는 것이 현대인의 고질병, 강박적 과소비(compulsive overconsumption)의 특징이다.
절제의 브레이크가 고장난 상태를 이해하려면 도파민 이야기가 빠질 수 없다.
과자한봉을 먹고도 다음 봉지를 뜯고 싶은 마음, 유튜브 영상을 무한 클릭하는 좀비로 만드는 것이 도파민의 작업이다.
도파민 좀비
도파민의 농간
뇌세포는 시냅스를 통해 전기적신호, 신호전달물질을 가지고 서로간 소통을 한다. 도파민은 이 중 보상과정(reward process)을 담당하는 신호전달 물질이다. 도파민 자체가 중독물질은 아니지만 도파민이 더 빠르고 많이 분비될 수록 더 큰 쾌락을 느끼게 된다. 도파민이 분비되는 양으로 특정 자극이 얼마나 중독적인지 가늠할 수 있다. 쥐를 통한 실험에서 초콜릿은 55%, 니코틴 150% 코카인 225%, 특히 암페타민은 1000%까지 뇌 속 도파민 분비가 증가되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느끼는 중독성 정도와 순위가 유사하다.
아예 도파민이 시키는데로 자극에 계속 노출되면 어떻게 될까?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행위로 얻는 쾌락의 양은 줄고 약해진다. 쉬운 예로 두번째 과자봉지를 먹을때는 첫 봉지에서 느낀 만족감이 덜하다. 같은 만족감을 위해 더 먹거나 아니면 더 강력한 맛의 과자가 필요하다. 유튜브 영상도 마찬가지다. 비슷한 영상으로는 더이상 재미를 느끼지 못하고 더 자극적인 영상을 클릭하며 도파민을 짜낸다. 약물중독처럼 내성(tolerance)이 생긴 순간이다.
현대인의 적은 전쟁도 호환 마마도 아니다
우리는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세대이지만 그다지 행복하지 않다. 항상 도파민 세례를 해주는 자극원에 둘러싸여 살다보니 자극적인 음식이나 컨텐츠들 없이 보내는 시간들이 한없이 지루하고 아무런 감흥도 느낄 수 없다.
어릴때는 엄마의 눈치를 보며 하루에 한시간씩 본 티비 드라마가 너무 신나고 재미 있었다. 하지만 이제 넷플릭스로 에피소드 12개짜리 시즌 4개를 하루만에 정주행할 수 있게 되었지만 어릴때 만큼 신나고 재밌지가 않다. 감각의 번아웃이 오고 무감동 상태가 되지만 그렇다고 영상을 끊으면 금단현상으로 불안, 초조, 기분저하, 허탈함이 몰려온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영화 매트릭스 속에 갖혀있는 네오처럼 무기력해져 버린다.
매트릭스 속 휴먼 배터리
판매량이 부의 척도인 자본주의에서 어떻해든 관심을 끌어 소비로 이어지게 하는 것이 지상최대과제이다. 그 결과 우리는 오감을 만족시키는 자극의 천국에 살게 되었다. 감각 유혹이 넘처나는 환경에 사는 현대인에게 중독을 모두 개인탓으로 돌리는 것은 가혹하다. 구석기 인들이 활동적이었던건 당시 유튜브가 없었기 때문이다. 환경이 다른 현대인에게 좀더 참으라거나 자극을 피해 산으로 들어가라고 하는 건 해결책이 아니다.
앞으로 우리사회가 덜 자극적인 순한 맛으로 회기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는데 나처럼 도파민 자극에 민감할 수록 자극의 홍수에서 자율성을 유지하는 법을 익혀야 한다.
과도한 자극에 끌려다니지 않는 실전 기술에는 감각과 거리를 두는 것 그리고 지루함과 친해지는 것 두가지가 있다.
감각 격리
과자를 끊어 내겠다면서 과자를 눈앞에 두고 참을 인을 되내이는 것은 매우 비효율적이다. 도파민 자극에서 벗어나려면 짧은 기간이라도 자극없이 지내야 한다.
물론 나도 과자없이 하루, 일주일 버티는게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우선은 감각 번아웃에서 회복하려면 자극없애고 일주일 혹은 그이상 지내는 것이 필요하다. 과자가 아닌 다른 자극도 마찬가지다. 처음엔 전부 없애 버리고 나서야 적은 자극에도 감동을 받을 수 있고 자극으로 전두엽을 마비시키는 대신 다른 흥미거리로 재미를 찾을 수 있다.
다만 과자는 마약류로 분류될 식품까지는 아니라 난 조절가능한 선에서 즐기는 것으로 절제 수위를 낮췄다. 일주일 중 토요일에만 과자를 먹고싶은 만큼 먹는 방법이다. 무제한으로 건조 유탕과자를 먹으면 입안도 까지고 미식거리는 느낌도 받는다. 이런 부작용은 과자에 대한 과도한 환상을 줄이는 긍정적 역할도 한다.
과자를 하루에 정해진 양만먹기도 이미 해봤다가 실패했다. 매일 과자의 하루먹을량을 재고 맛보고 하는 행위자체가 계속 의지력을 소모했기 때문이다. 하루 28g이 피곤한날 50, 100그람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자극원을 눈앞에 두고 난 강한 사람이라고 다짐하는 것은 만용이다. 그냥 모두 눈에 보이지 않으면 불필요한 의지력 소모가 없다. 최근에 알게 되었지만 자기 절제에 강한 사람은 의지력이 강하게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의지력이 고갈되지 않게 아끼는 사람들이었다.
지루함과 친해지기
과자 외의 유혹들은 아직 시도와 실패를 반복하고 있다. 자극과의 전쟁이 힘든 것은 자극이 없을때 지루함을 견디기 힘들기 때문이다. 무언가 행동을 하는게 피곤해지는 나이가 되면 지루함을 수동적인 감각 소비로 쉽게 채우려한다. 하지만 일상의 지루함은 새로운 즐거움과 미션을 찾아 나서게 하는 발판이다. 꼭 필요한 고통을 단순히 외부 감각자극으로 덮어서 쾌락을 얻으면 결국 더 큰 고통이 뒤따라 온다.
유튜브는 시간제한을 걸어놓고 알림이 뜰때 잠시 핸드폰을 치우면 첫 10분간은 다음 내용이 궁금하고 뭘할지 몰라 안절부절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간절함은 누그러들고 다른 흥미거리가 눈에 들오면 잠시 영상을 잊혀지기도 한다. 컨텐츠없이는 일상에 재미가 전혀 없을거 같아도 사실 일상의 재미를 가리는게 바로 컨텐츠다. 지루함을 피해 영상으로 도망다니기 보다는 정면 돌파가 필요하다. 간헐적 단식을 위해서 건강한 허기에 익숙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극에서 벗어나기위해서는 지루함을 이겨내야 된다.
자기절제
인간은 누구나 행복해지고 싶어한다. 나 역시 행복해지는 것이 인생의 과제였다. (Being Happy!)
내가 했던 초반의 실수는 고통을 피하기만하면 행복할거라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 몸은 계속 쾌락만 즐기도록 설계되지 않았다. 신체의 항상성은 쾌락으로 감각이 과하게 기울때 이를 중재하기 위해 통증을 불러들인다. 쾌락과 고통을 처리하는 뇌의 영역이 겹친다는 점은 과도한 쾌락 추구가 고통을 동반한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즉 무한한 쾌락추구는 무한한 고통을 유발하게 된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과도한 탐닉으로 향하려 할때 방향을 틀어 브레이크를 거는 절제가 필요하다.
학창시절 윤리시간에 배운 스토아학파, 절제 그리고 중용은 엄청난 도덕 군자들이나 논하는 개념인줄 알았는데 내가 과자, 유튜브 끊을 때 쓰리라곤 생각도 못했다. 이제와보니 절제는 도파민 분비기전과 신경과학보다도 생존에 더 필수 덕목이 아닐 수 없다.
내몸 활용 매뉴얼이 있다면 아마도 두번째 장에 자기절제(temperance)의 기술을 기록해 두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