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어느 곳을 가더라도 운전하는 사람은 '교통지옥' 한번쯤은 맛보게 된다. 출퇴근 시간, 아이들 등하교시간은 말할 나위 없이 전쟁의 시작이다. 1분 1초라도 빨리 나서서 도로를 빠져나가는 길이 진정 살 길이다.
그런데 왠지 나는, 길이 막혀서 차 안에서 꼼짝달싹 못했던 이야기 말고 솔직 담백하게 고백하고 싶은 것이 있다. 운전대를 잡으면 전쟁터에 나가는 미친 꼬레아나(coreana, 한국여자)가 되었던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한국에서도 마이애미에서도 운전을 했던 나인데, 리마의 도로를 보니 진정 '기적'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어렸을 때 봤던 티코가 여전히 굴러 다니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낡은 차량들이 매연을 내뿜으며 덜덜 거리며 달린다. 도로의 빈틈이 생기면 서로 비집고 그 자리를 차지한다. 차선을 새로 그리려면 예전 차선은 확실히 지우고 다시 그려야 할 것인데, 이쪽저쪽 다 하얀색 선이 그려져 있다. 어느 것이 내 차선인지, 어느 선에 맞춰 가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결국 앞차에 바짝 붙어가는 게 상책이다. 옆에 있던 차가 내 앞으로 끼어들면 다음차도 끼어들고, 그다음차도 끼어든다. 매너 있게 양보했더니 뒤에서 클랙슨을 울려대며 언제 갈 거냐고 재촉한다.
내가 가기 싫어서 안 가냐고! 앞에서 자꾸 끼어드는 걸 어떻게!
여기서 진정 운전이란 것을 할 수 있는지 '허걱' 소리가 절로 나왔다. 자주 가는 쇼핑몰이 있다. 쇼핑몰 출구를 빠져나가자마다 난관에 봉착한다. 수많은 꼼비(combi, 봉고차, 페루의 교통수단 중 하나)와 버스들이 서로 뒤엉켜 길을 막는가 하면, 꼼비와 버스를 타려는 사람들로 혼잡하다. 그 앞을 통과해야 한다. 재빨리 틈을 노려 빠져나가거나,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전진해 내 차의 머리를 들이미는 수밖에. 속으로는 식은땀이 줄줄 흐른다. 내가 머리를 들이미는 바람에 달려오는 차가 섰다. 역시나 나에게 "빵!!!!" 클랙슨을 울리며 소리 지른다. 흥! 내가 질세라 대담하고 우아하게 난 나의 길을 간다. 쫄지말자. 여기서 사고가 나봤자 접촉사고다. 늘 길이 막혀있기 때문에 최고 80km 이상을 달려본 적이 없다. 언제나 서행 운전에 내 발은 엑셀이 아닌 브레이크 앞에 있다. 언제든지 급 브레이크를 밟을 수 있게. 손은 언제든 클랙슨 앞에 두고 내가 지나갈거니 비키라는 경고의 신호를 보낸다.
나도 "빵빵"좀 할 줄 아는 꼬레아나라고!
사진 출처: diariocorreo.pe / peru hop
운전대를 잡은 순간, 스페인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입니다.
세뇨라(señora , 부인) 브런치 모임에서 한 엄마가 페루에 온 지 한 달 만에 운전하다가 경찰한테 잡힌 이야기를 했다. 그 엄마는 스페인어를 거의 할 줄 몰랐지만 용감하고 당찬 성격이라 페루에 오자마자 운전을 시작했다. (사실 이 엄마가 페루에 오자마자 운전을 시작했다는 소리에 나도 용기를 내서 운전을 시작했다.)
"애들 학교 앞 로터리에서 경찰이 나를 잡더니 서라고 하는 거예요. 나? 그러더니 스페인어로 막 뭐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저는 스페인어를 전혀 모르잖아요. 그래서 미안하다고만 했죠. 그런데 또 스페인어로 계속 뭐라고 뭐라고.. 진짜 저 울뻔했어요. 정말 못 알아 들어서 손짓 발짓 해가며 한국말로 "요 에스파뇰 노(스페인어 못해요)" "디스꿀뻬(미안합니다)"만 했어요. 그랬더니 또 한참을 스페인어로... 근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말이 뭐였는 줄 알아요? 가라는 말이었어요. 그 경찰도 포기한 거예요. 제가 하도 못 알아먹으니깐, 그냥 가라고.... 그런데 그것도 못 알아듣고 계속 안 가고 경찰을 붙잡고 있었던 거죠"
모여있던 세뇨라들은 그 이야기가 너무 웃기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며 뒤로 넘어갔다. 아직도 정작 무엇 때문에 경찰에 잡혔는지 모른다. 스페인어를 못하는 게 경찰한테 잡히면 용케도 해결책이 될 수도 있겠다고 한참 그 이야기가 화제가 되었다. 경찰한테 잡히면 무조건 못 알아듣는 척을 하는 방법을 쓰기로 했다. 절대 알아들으면 안 된다.
얘들아, 손 좀 내밀어줘-!
시동 걸리는 것이 신기한 만큼 여기저기 상처 가득한 차들이 창문을 활짝 열고 손을 내민 채 달린다. 위험하지 않나? 처음엔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여기는 깜빡이로 신호를 보내는 것보다 운전자가 손을 내밀며 차선변경 신호를 보낸다. (물론 모든 운전자가 그러는 것은 아니다.)
아이들 학교에서 집으로 가려면 Pan Americana Highway(고속도로)를 반드시 타야 한다. 오른쪽으로 차선을 변경해야 하는데, 우측 깜빡이를 켜도 아무도 양보해 주지를 않는다. 뒤차는 내가 진행 방향을 방해하니 시끄럽게 빵빵 클랙슨을 울린다. 이럴 때는 미안하지만 아이들의 도움을 받는 수밖에 없다. 뒷좌석의 창문을 활짝 연다. 차 안으로 바람이 시원하게 들어온다.
"얘들아, 손 좀 내밀어줘~ 비켜 달라고"
"우웩, 냄새.... 매연~~ 알겠어~엄마~"
"나도 같이 손 내밀래~"
"그쪽 아니고, 형아 쪽이야~하하하"
고사리 같은 손이 삐쭉하고 나온다. 역시나! 드디어 비켜준다. 급할 때는 좌우 깜빡이 보다 "손"이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페루사람들이라 아이 손이 빼꼼 나오니 마음이 약해졌나? 나 혼자만의 생각이다. 창문을 열고 뒷 차량에 엄지 척! 최고! 를 날린다. 양보해 준 당신 최고!
운전할 때는 나도 뻬루아나(Peruana, 페루여자)가 된다. 끼어들 땐 끼어들고! 내 앞에 끼어들면 나도 '빵' 하고!!어디감히 내 앞을. 어느새 페루식 내 마음대로 운전에 익숙해져서 교통법규를 잘 지키는 한국운전이 힘들다. 속도를 지키는 것도, 차선을 잘 지켜야 하는 것도, 내 마음대로 끼어드는 운전을 했다가는 욕 먹기 십상이니. 길이 막히든 말든, 라틴음악을 따라 부르며 운전하던 때가 문득 생각이 난다.
리마운전 tip,
- 길 막히는 시간은 무조건 피하세요. 되도록 5시 전 귀가 추천드려요. 혹은 퇴근시간을 피해 아주 늦은 시간.
- 언제나 약속시간보다 일찍 움직이셔야 늦지 않습니다. (낡은 차들이 많아서 길 한가운데 차가 퍼지는 경우가 많고 접촉사고도 자주 일어납니다.)
- 한국식 운전법으로 양보를 계속해주셨다가는 집에 못 가십니다. 적당히 양보하고 대범하게 치고 들어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뒤에서 계속 빵빵거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