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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앙카 Mar 01. 2023

착한 며느리 콤플렉스에서 탈출한 시어머니 생신상

혼자 너무 애쓰지 마세요.


  시댁 단톡방 아버님 메시지에서 시작한다.



카톡 단톡방

 외식이 아니고 집에서 먹자고 하신다.


 본능적으로 '생신상 준비'를 떠올렸다. 집에서 하는 생신 파티에 케이크와 와인만 달랑달랑 들고 갈 하루 이틀 며느리 연차는 아니다. 폭풍우가 한번 휘몰아친다. 폭풍우가 지나간 자리에 고요함이 찾아오자 아버님의 그다음 메시지가 눈에 들어왔다.  왕할머니 거동이 불편하시니 바깥 외출이 어려우신 점과 며느리 생각해서 힘들게 하지 말고 애들 좋아하는 것으로 간단히 하자는 아버님 의중이셨다.  

  

 그런데 이 집 며느리는 괜찮다고 해도, 하지 말라고 해도 이 정도는 해야 하는 거 아니냐며 말을 듣지 않는 스타일이다. 평소 자주 먹는 메뉴를 올리는 건 아무래도 섭섭해하실 것 같고, 식탁이 초라해 보이는 건 뭔가 꺼림칙스럽다. 나름 직접 만들고 차리는 음식은 구색을 적당히 갖춘 게 좋다. 지난 생신에 페루 스타일 음식과 와인안주를 만들어 드렸고 파스타와 피자도 만들어 드린 적 있다. 크리스마스엔 스테이크, 감바스도 해드렸는데 이번엔 뭘 해야 하나... 또다시 착한 며느리 콤플렉스가 돋기 시작한다.


  착하고 순종적인 며느리가 오랫동안 되어보려 했다. 그런데 12년 차가 되니 슬금슬금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다. 시부모님 생신에는 며느리가 생신상을 차리는 게 당연하다면, 장인 장모님 생신에는 사위가 차려주나? 며느리 생일에는 시어머니가 생일상을 차려주나? 어머나. 생각이 어디까지 가는지. 미쳤다.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고 만다.


물, 단무지, 효도는 대한민국 3대 셀프



 이런 고약한 마음이 드는 나 자신이 싫었다. 어느새 진심과 정성에 대한 대가를 바라고 있었나 보다. 지금까지 내가 기뻐서 한 일이 모두 거짓이 되어버리는 것 같았다.


 "레스토랑, 식당에 가봐야 비싸기만 하고 며느리 네가 차린 밥상이 식당보다 훨씬 맛있다. 어떻게 이런 국물을 내니? 정말 맛있다"  노력한 만큼 언제나 최고의 칭찬으로 되돌려주셨다. 다행이고 기뻤다.


 착한 아이 콤플렉스를 가진 아이는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 뒤따라 오는 것들이 있다. 이번에 100점을 맞았으니 다음번 시험에도 100점을 맞아야 한다는 부담감이다. 잘 보이기 위해 매일 열심히 공부했는데, 이번 한 번만 대충 시험 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순간. 바로 죄책감이 들고만다.


'아~대충 했다가 실망하시면 어쩌지? 결국 내 마음에 안 들어서 후회할 거야.'

'며느리 사춘긴가? 나.. 며느리 12년 . 사춘기 맞네......'

'이거 나 혼자만 보는 시험이니? 생각해 보면 내 시험도 아니잖아!'


마음속에서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이번에,

나... 착한 아이, 착한 아내, 착한 며느리 콤플렉스에서 벗어날 수 있겠구나. 귀한 생신상을 보기 싫은 시험 따위로 비유하는 것 자체가 부끄럽다. 생각이 이리저리 핑퐁 치는 사이에 이 고약한 냄새의 원인과 해결책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나의 정답을 찾아갔다.


시댁 식사와 주방일에 아들 지분은 없고, 며느리 지분 100%로 메뉴를 고민하고, 만들고, 차리고, 치우고 있었으니 힘들 수밖에. '저 정말 괜찮아요.'를 남발해 가며 혼자만 잘해보려고 애쓰니 결국 구린내가 나고 탈이 날 수밖에. 누가 시키지도 않은 남편의 '효'까지 며느리 제가 하겠다며 손을 번쩍 들었다. 그래놓고 남편이 아버님과 거실에서 티브이를 보고, 나 홀로 시어머니 주방에 있는 걸 느꼈을 때 어라? 이건 무슨 감정이지? 내가 하겠다고 한거잖아.


자가진단을 마쳤으니 이쯤 되면 손을 써줘야 할 때다.




  초록색과 빨간색 창을 띄워가며 중식, 양식, 한식 레시피를 찾아 돌려본다. 남의 레시피에 있는 화려한 상차림 사진을 보면 볼수록 이 정도는 해드려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멈춘다. 이런 건 보지 말자. 부담 갖지 말고 내 계획 안의 몇 가지 조건에 충족되는 메뉴들로 기분 좋게 골라 보자.   


나:셰프, 남편:주방보조

1. 집에서 조리 후 통에 담거나, 냄비채로 시댁으로 가져갈 수 있는 요리. 가서 데워 먹기만 하는 요리. (먹기 직전에 해야 하는 파스타, 스테이크는 탈락)
2. 주방 보조가 레시피만 잘 읽어봤으면 어렵지 않게 혼자 할 수 있는 요리 (든든한 셰프는 말만 보태고  옆에서 지켜볼 것이다)
3. 메인요리는 셰프가 많이 해본 자신 있는 요리(새로운 메뉴는 시도하지 말 것)


 그래서,

 지극히 평범하고 흔한 메뉴. 갈비찜 너로 정했다.

 갈비찜, 미역국, 동그랑땡, 샐러드, 월남쌈 끝! 어차피 자잘한 밑반찬들은 젓가락에 잘 가지 않는다.


 새벽 배송을 받으려면 밤 11시 전에 장을 봐 놔야 한다. 

시계를 보니 벌써 10시 30분이 넘었다. 마음이 급해졌다. 내일 새벽부터 갈비 핏물 빼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니 반드시 지금 주문에 성공해야 했다.


"엄마~ 형아가~~"

"엄마~ 수현이가~"

"야! 지금부터 엄마한테 아무도 말 걸지 마!  굉장히 중요한 순간이야"

 엄마에게 시간을 좀 달라는 소리를 아이들에게 아무렇게나 내뱉었다. 머릿속에 있는 식재료 리스트를 펼쳐내고 눈동자와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인다. 필요한 모든 재료를 장바구니에 담았다. 결재버튼 꾹-!


 - 휴우. 3분 전. 성공!



주문에 성공하자마자 현관문 도어록 열리는 소리와 함께 남편이 퇴근해 돌아왔다.


"내일 새벽에 장 본 거 배달 올 거야~"

"어~ 그래."


역시나. 무슨 말인 줄 모른다. 돌려 말하지 말고 직접적으로 말해야 알아들을 것 같다.

"새벽에 깨울 테니깐, 일어나~들었지?."


 집안의 안녕과 평화를 위한 일이니, 회사 일에 야근하고 돌아온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은 속으로만 생각하기로 했다. 주말이면 늦게까지 자고 싶어 하는 것도. 피곤하다는 것도 알지만.

이번에는 당신 지분이 반드시 꼭 필요해요.




 새벽 알람이 울렸고 눈을 잠시 더 감았다.  하지만 일어나야 한다.

 현관문에 있는 배송 박스를 들고 들어왔다. 제일 먼저 미역과 국거리용 소고기, 갈비를 꺼냈다. 시원하게 물을 틀고 '쏴-아'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남편 목소리다. 슬리퍼 질질 끄는 소리를 내며 남편이 눈을 꿈뻑꿈뻑 대고 있다.


"대~박! 안 깨웠는데, 일어난 거야?!"  

처음 있는 일이다. 딱 한마디 했을 뿐인데 효과가 직빵이네? 웃음이 났다.

"어제 미역국 레시피 카톡으로 보낸 거 봤어? 어머님이 아들이 끓인 미역국 드시면 엄청 좋아하실걸? 그래야 의미가 있지." 아들이 끓인 미역국이라는 이름을 붙여내고는 내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미역 불리는 동안 동그랑땡에 들어갈 반죽을 만들어서 남편에게 부치라고 할 것이다. 남편은 미역국 끓이기 레시피를 보고 있었다.

"아~ 미역국에 들어갈 소고기 핏물 빼고 있는 거야? 자기가 미역도 이미 불려놨네"

남편은 국간장과 소금, 마늘을 찾았고 나는 미역국에 참치액젓을 넣으면 요술 방망이 효과가 있으니 한 스푼 넣어 간을 맞춰보라고 했다.

 동그랑땡 반죽 만드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다. 문제는 반죽을 손으로 치대는 것이다. 반죽을 치대다 보면 손바닥이 빨개지고 팔에 힘이 들어가 쉬었다가 치대기를 반복해야 한다. 충분히 잘 치대야 찰기가 생기고 나중에 동그랗게 만들어 프라이팬에 부치기도 좋다.

 "반죽 치대는 일은 힘 좋은 남자가 해야지.(난 최대한 힘을 뺄 계획이니.)" 동그랑땡 반죽통을 남편에게 슬그머니 밀었다.






 "자기야, 이 정도 하면 돼? 언제까지 해야 돼?"

 "내가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갈비찜에 들어갈 재료를 돌려 깎기 하다 말고 고개를 휙 돌려 반죽통을 확인했다.

 "오! 잘하는데? 충분해! 그만해도 돼~ 내가 동그랗게 굴려 만들어 줄 테니깐, 오빠는 이제 달걀물에 퐁당퐁당 해서 프라이팬에 부치기만 하면 돼~"

 남편이 프라이팬에 3번에 걸쳐 동그랑땡을 부쳐내는 동안 보글보글 갈비찜도 점점 완성되어 갔다. 나는 남편의 미역국에 마지막 간만 맞춰줬다. 소고기를 달달 볶고 미역도 달달 볶고. 잘한다 잘해! 옆에서 보조만 맞춰주니 이 사람 너무 잘한다.

 "오빠! 진짜 맛있다!! 더 짜면 안 돼. 이 정도가 딱 좋아" 엄지 척! 궁딩 팍팍!

 

 생각보다 남편이 너무 잘한다. 월남쌈에 들어갈 새우도 삶았고 야채도 썰어 통에 담았다. 샐러드, 갈비찜, 동그랑땡, 미역국도 모두 다 척척 완성되었다. 5시간 쉬지 않고 주방에서 남편과 일을 하는데도 힘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즐거웠다.

 "오빠, 양념 등갈비 하나 더 해야겠다" 서둘러 냉동고에서 등갈비를 꺼내 찬물에 해동시켰다.  

 "자기야, 이미 충분해. 그만해~ 하지 마~"

 "헤헤헤~ 오빠 안 시켜~ 이거 한번 삶아내고 양념만 만들어서 계속 조리면 돼. 애들이 선물 준비하는 동안 만들면 시간 딱 맞아."  



 

 시부모님과 약속한 시간에 늦지 않게 맞춰 끝이 났다. 만든 음식 박스를 들고 시댁으로 갔다.




"아이고, 뭐 이리 많노?" 아버님이 목소리 톤이 살짝 올라가셨다.

"어머나~세~상에! 이게 다 뭐니~ 너무너무 고마워~" 어머님이 먹기 전에 사진을 찍어 놓고 싶으시다고 기다리라고 하신다.


"흠흠! 이번 생신상에 제 지분이 좀 있습니다!" 목소리를 가다듬고 남편이 으쓱거리며 말했다. 참내, 누가 말 안 해줄까 봐!

"그럼요! 그럼요! 오빠가 얼마나 잘했다고요!" 아들이 힘든 일은 다 했다고, 미역국이 제일 맛있다고 최고라며 남편의 어깨를 만져주었다.  

아마도 두 분 입맛에도 아들이 만든 미역국과 동그랑땡이 제일 맛있었을 것이다. 혼자 끙끙대며 스트레스를 받을 것이 없었다.


내가 바랬던 것은 "함께"였다. 그리고 나, 며느리는  

잘하고 싶어서 과하게 속도 내거나 열심히 하지 않기로 했다. 앞으로 꾸준하게 할 수 있을 만큼만 변함없이 하기로 그날 결심했다.


한 집에서 같이 사는 가족일지라도 실은 서로 고독하다.  왜냐하면 각자 나름대로 살아갈 것을 신에게 명령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삶들은 누구 하나 칭찬해주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훌륭하게 완결되어 빛난다. 자기 행위를 타인에게 평가받지 못해 안절부절못하는 사람들은 버둥거릴 수밖에 없다. 내가 만족할 수 있는 삶을 보내고 있다면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행복하다는 자신감이 중요하다.


 약간의 거리를 둔다- 소노 아야코 에세이 中



덧붙임.

손자들이 만든 반전우산을 두 손에 꼬옥 모시고 들어가니, 자꾸 우산은 현관 밖에 내다 놓으라고 하셨다.  

용돈 반전우산. 멘트가 중요하다: 요즘 살림이 어려워서 선물로 우산을 준비했어요. 꽤 튼튼한 것이니, 한번 펼쳐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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