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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ianca Sep 15. 2020

이탈리아에서 한 결혼식

이탈리아의 모든 행정처리는 꽤나 복잡하고 한국처럼 빠르게 진행되지 않는다.

두 사람이 부부가 되는 법적인 절차도 한국에 비해서 과정이 더 길고 복잡하다.


한국에서는 일단 주변의 사람들에게 신고식 하듯 먼저 알리는 알림성의 ‘결혼식’ 후  혼인 신고를 통하여 법적인 부부가 되는데  이탈리아에서는 일단 결혼을 하기로 결정한 후에는 해당 거주지의 구청 (동사무소에 해당하는 곳은 없다)에 가서 ‘혼인 서약’이라는 서류를 통해  ‘혼인’ 시작의 수순을 밟아야 한다.


구청에서 시작한 결혼을 위한 ‘혼인 서약’ 서류가 로마시청에 들어가 접수가 되면 로마시청에서 ‘혼인 공고’를 공식적으로 알리는 기간이 있고 그 이후 6개월 이내에 결혼식을 하게 된다.   가톨릭 신자가 성당에서 결혼할 경우에는 ‘혼배 성사’를 하게 되므로 천주교에서의  준비과정이 추가적으로 더 있다.   만일 가톨릭식으로 성당에서 예식을 하지 않으면 로마시청에 있는 식장(시청에 속한 공관) 스케줄에 맞추어 날짜를 잡아야 한다.  우리나라와 같은 결혼식만을 올리는 예식장은 없다.   공고 후 6개월 이내에 식을 올리지 않을 경우에는 무효가 되어 다시 처음부터  서류 절차를 밟아야 한다.   


우리나라와 다른 점은 결혼을 맹세하는  ‘혼인 서약’의 서류로 두 사람이 미리 서명하고 신고한 다음에 결혼식으로 마무리하여 확실히 호적에 기록된다는 점이다.   내가 결혼할 당시에 나는 아직 가톨릭 신자가 아니어서  로마 시청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시민 결혼’  Matrimonio civile의 형태로 진행하였다.  




나는 한국식으로 엄마에게  좋은 결혼 날짜를 물어보았다.

그러자 시어머니께서는 “ 비앙카,  일 년 365일이 다 좋은 날이다.  너희들이 좋은 날에 결혼식을 하면 된다 “ 고 하셨다.

문제는 로마시청에서의 결혼식 홀은 사용 가능했는데 우리가 하고 싶었던 피로연 장소가 인기 있는 곳이라 그랬는지 1년 치 예약이 전부 되어 있어 들어갈 틈이 없었다.   남편은 예약이 가득 넘쳐난 그 피로연 장소를 보고 더더욱 그 장소만을 고집했다.   우리는 결국 예약이 취소된 피로연 장소의 빈자리에 맞추어서 결혼식 날짜를 정해 버리고 말았다.


결혼식의 규모도 조촐한 형태로 가까운 친지와 친구들 위주로 하고 준비를 하기 시작하였다

이탈리아에서 하는 결혼식이니만큼 이 나라의 풍습에 맞추어서 따라가야 하는 게 당연한 것이었고 그 대신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풍습인 시댁에 예단을 선물하고 이바지 음식을 보내고 시댁 어른들께 절을 하는 등등은 결코 아쉬움 없이 모두 생략했다.  


한국과 다른 결혼 풍습들은 결혼 기념품, 콘훼티 준비(기념 사탕 주머니), 결혼식에 쓰일 자동차 준비, 신부집을 장식할 꽃 준비,  성당에서 결혼할 경우에는 성당을 장식하는 꽃 준비.... 등이다.   웨딩드레스는 대여도 있지만 대부분은 본인에게 맞게 맞춤으로 하여 일생의 한 번인 유일한 그 날을 맘껏 즐기고 뽐낸다.


이탈리아에서는 신부의 드레스를 결혼식 전에 신랑에게 비밀에 부친다.  따라서 신랑은 결혼 당일 신부가 식장을 들어설 때라야 웨딩드레스 입은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다.   마치 하나의  ‘서프라이즈’ 형식으로 결혼식 때까지  비밀이다.

나는 신부의 웨딩드레스가 신랑에게 결혼식 전까지 완전히 비밀에 부쳐지는 그들의 풍습이 참 맘에 들었다.

결혼식에는 누가 뭐래도  신부가 주인공이고 특히 신랑에게 궁금증을 최대로 증폭시켰다가  영화 속의  ‘여배우’처럼 나타나는 깜짝쇼의 연출이 그날에 더 충격적인  감동을 선사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나도 시누이의 도움을 받아 결혼식 때 입을 드레스를 결정하느라 여기저기 다니며 발품을 판 기억을 더듬으니 지금도 웃음이 난다.


‘옷’이라는 게 하나의 외관이며 겉모양이지만 일생에 단 한 번뿐인 중요한 날을 위해서 입는다는 의미 있는 복장이면 문제는 좀 달라진다.   신부에게 아마  ‘결혼식’ 준비의 커다란 관심사도 아마 드레스를 준비하는 일일 게다.   내가 원했던 스타일은 비교적 심플하면서 많은 장식이 없는 형태였고 중요한 것은 나를 표현하는 하나의 방법이 ‘복식’이기 때문에 내가 편안함을 느끼는 게 가장 중요했다.


내게 특별한 인상을 주었던 것은 신부가 자기가 살던 집에서 결혼식장으로 나갈 때 집 앞의 현관을 파란색의 카펫으로 깔아 놓는 전통이었다.   신부에게는 파란색이 ‘성실’과 ‘순결’한 신부를 상징한다는 의미로 파란색으로 장식한 작은 핀,  허벅지에 스타킹을 고정하는 고무밴드 가터(Garter) 링,  리본 장식 등을 신체에 장식하는 풍습이 있다.

그리고 신부의 집 입구와 현관을 꽃들로 장식하고 아파트 같은 경우는 계단들도 꽃으로 꾸며 신부의 결혼을 이웃에게도 알린다.   아마 꽃길 같은 인생길을 걸으라는 의미일까?    




이미 오래전에 하늘나라로 가신 아빠를 대신해서 우리 집과 특별한 인연이 있는 사촌 오빠와 엄마가 한국에서 오셨다.

어릴 때 잃은 아빠지만 대학 졸업식날 이후  ‘아빠의 부재’를  가장 깊이 피부로 느껴 본 날이었다.


이틀 동안 비가 와서 걱정을 했건만 막상 결혼식 당일날은 맑고 높은 가을 하늘과 화창한 날을 선물로 받았다.

나는 내가 살던 작은 아파트 현관을 장식한 꽃길을 따라 나가서 파란 카펫을 밟아 보고 남편이 기어이 우겨서 마련한 하얀색의 롤스로이스에 공주(?)처럼 앉았다.   지금 생각하면 이탈리아에서니까 할 수 있었던 결혼식의 혜택이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결혼 후 실제 나의 삶은 깊은 진흙탕길을 걷을 때도 있었고 눈물, 콧물 짜내며 지냈던 날도 많았지만....


결혼식장은 베네치아 광장 뒤의 로마시청이 있는 캄피돌리오의 ‘붉은 홀’  Sala rossa.

고대 로마 유적지인 포로 로마노 Foro Romano를 아래에 두고 우뚝 서있는 캄피돌리오의 광장에 나는 만 가지의 다채로운 감정으로 하얀 차에서 내렸다.

10월의 어느 토요일 12시.  

여느 때처럼 수많은 관광객들과 눈치 없는 비둘기들이 자기들 세상인양 여기저기 배회하는 풍경이 평화롭기만 했다.


아빠를 대신해 나를 식장에 동행해 준 사촌오빠.  캄피돌리오 광장에서.

이탈리아에서는 결혼식에서 신랑이 입장할 때 신랑의 엄마가 함께 동행을 한다.  

모계사회의 풍습인가!?   

내게는 지금까지도 받아들이기가 좀 어색한 장면인데 아무튼 그들의 전통이란다..

그리고 신부의 입장이 있고 난 후 결혼식의 과정은 시청의 담당 공무원인 듯한 분이 - 우리의 결혼식 주례는 여자분이셨다 -혼인 관계에 대한 법 조항을 낭독하는 것이다.    한국처럼  세상을 산 연륜이 있는 분이 새 출발하는 신혼부부에게 하는 희망과 조언, 당부의 주례사는 당연히 없었다.


그리고 나와 나의 평생 동반자가 될 남편은 서로에게  18k 결혼반지 Fede 를 교환하고 증인 두 사람과 함께 혼인 계약서에 사인을 했고 우리는 법적인 효력이 있는 공식적인 아내와 남편이 되었다.

결혼식의 마무리에 혼인 신고에 서명하는 모습

그 날 이후로 나는 그를 나의 남편으로 맞아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건강할 때에나 병들 때에나 부유할 때에나 가난할 때에나 변함없이 남편을 사랑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데 아내의 도리를 다 하겠다는 것을 맹세한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하는 종교적 맹세는 아니었지만 당시 18개월이었던 ‘아들’ 앞에서도  다짐한 약속이었다.

결혼식 6개월 뒤에 나는 정식으로 가톨릭 신자가 되었고 성당에서 하나님 앞에서 맹세하는 약식의 혼인을 다시 한번 하였다.   같은 남자와 결혼예식도 두 번씩이나 한 셈이다.




이탈리아에서의 결혼 피로연은 한국에서보다 훨씬 성대하다.   결혼식에 초대된 손님은 적어도 그 날 하루는 주인공들을 위해 완전히 제공해야 한다.   피로연을 길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캄피돌리오에서 12시에 식을 올리고  각자가 피로연 장소로 이동하여서 환영 뷔페로 야외에서 시작한 점심식사가 정식으로 실내로 옮겨져서  끝났을 때는 7시가 다 되었다.  손님들도 진이 다 빠질 판국이니 당사자들에게는 오죽하랴.   먹는 게 입으로 들어가는지 귀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축배의 잔을 부딪치며 친지들과 친구분들의 흥이 한참 고조되었을 때에 나의 친구들이 나와서 ‘아리랑’으로 축가를 불렀다.   그러자  남편의 친구들이 몰려나와 로마를 찬양하는 로마인들의 전형적인 노래로 답가를 합창하며 모두가 축하의 분위기에 젖어 먹고 마시는 것 이외에 웃고 노래하는 연회를 만들었다.   


결혼식의 비디오에 나비넥타이를 매고 신사복을 입은 아들이 자신이 스크린에 나오는 게 신기해 보였는지 수백 번 되풀이해서 비디오를 보았던 기억이 난다.   아들은 엄마, 아빠의 결혼식에 같이 있던 자신을 발견하고 어린 시절 내내 신기해했었다.   우리 결혼식의 참 증인이었던 아들  -  부모의  ‘결혼’이 파기되어서  아픔을 겪게 되었고 또다시 엄마, 아빠를 연결해주는 이유와 다리 역할도 톡톡히 하게 될 줄을 그때는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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