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외손주를 만나보러 12시간의 비행으로 하늘을 날아오신다.
사랑하는 큰 딸을 이제 머나먼 이국땅에 남겨둔다고 눈물의 강을 만들며 헤어졌던 로마 공항에 나는 다시 서 있는 것이다.
로마 레오나르도 다빈치 공향에서 엄마를 기다리는 내 가슴은 콩닥콩닥 주체를 못하고 뛰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공항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흥분감은 짧은 시간에 경험하는 찐한 감정몰입의 압축이다.
출산 후, 내가 엄마가 된 후 - 그렇게 내게 그리웠던 엄마.
나는 아카데미아 졸업식에 오신 엄마께 충격적인 임신 소식으로 엄마에게 기쁨에 앞서 배신감을 느끼게 한 고약한 큰딸이 되었다. 하지만 엄마가 느꼈던 배신감을 깡그리 잊게 해주는 손주 녀석의 출현으로 지난날의 아픈 시간들도 빛바랜 사진처럼 되어가는 날들이었다.
저만치 엄마가 여행 가방을 밀고 걸어 나오신다.
나는 단박에 알아보고 달려가 안겼다.
“ 엄마 ~!! 잘 오셨어요.”
“ 엄마, 손주 민환이 봐! 정말 많이 컸지 “
“ 어머나.... 얘가 젖살이 붙어서 얼굴이 오각형이네. 하하 “
지금처럼 핸드폰으로 국제전화를 맘 놓고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기에 엄마의 방문이 너무 반가웠다.
우선 엄마가 오시니 풍성한 한식으로 그동안 아쉬워했던 고국의 음식에 대한 식탐을 사그라들게 해 주었다.
엄마가 해주시는 입에 살살 녹는 집밥들이 고팠던 참에 나는 그동안 먹지 못했던 한을 풀기라도 하듯이 먹어댔다. 한국에서 바리바리 싸오신 된장, 고추장, 고춧가루, 다시용 멸치, 다시마... 등등. - 이런 한식의 기본적인 식재료로 자글자글 끓이는 된장찌개며, 엄마의 손 맛이 들어간 김치를 먹게 되니 그동안 뭔가 모자랐던 2%의 채움이 내게는 수 백배의 효과를 나타내었다.
나는 엄마의 수고에 대한 답으로 내가 그동안 배운 이탈리아 음식으로 엄마를 즐겁게 해 드렸다.
볼로네제식의 라자냐 Lasagna, 브루스켓타 Bruschetta, 뇨끼 Gnocchi, 구운 송아지 고기 Arrosto di Vitello 그리고 엄마가 아주 좋아했던 호박 꽃잎 튀김 Fiori di zucca fritti ...등등
대부분은 미래의 시어머니와 시누이한테 어깨너머로 배운 그야말로 가정식 이탈리아 집밥 음식들이었다.
엄마가 로마에 오신 근본적인 이유는 첫째가 한 번도 보지 못한 손주 녀석을 보기 위한 것이고 둘째는 당연히 엄마가 된 큰 딸을 보는 것과 더불어 아직 미혼인 상태의 우리의 관계를 사회적, 법적으로도 명확히 부부관계가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이었다. 엄마의 생각이 백번이고 당연했다.
엄마는 사돈어른들께도 우리의 결혼을 의논하고 싶었던 것이다.
당연히 아이의 아빠와 나도 결혼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미래의 시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물으시길,
너희들, 결혼을 꼭 해야 하느냐?
예상하지 못했던 황당한 질문에 나의 답은
네, 당연하지요. 당연히 결혼을 해야지요. 우리는 이미 가족도 만들었는데요.
아직까지 ‘결혼’이라는 제도가 왜 없어지지 않고 존재하나요?
어머니, 아버님은 왜 결혼을 하셨나요?
결혼은 두 사람이 합의하여 새로운 가족을 만드는 법률행위이다.
넓은 의미에서의 결혼은 법적인 관계만이 아니라 사회, 문화적, 종교적인 요소도 결합되어 있다.
이제는 우리나라에서도 국제결혼을 하는 경우가 많아져서 예전과 달리 이상한(?) 눈초리의 시선으로 주목받던 시대는 더 이상 아니지만, 국제결혼을 하는 당사자들은 무엇보다 사회, 문화적인 차이를 잘 극복해야 하는 면이 있다.
내 경우처럼 다른 지역과 문화에서 자란 두 사람이 만나서 사귀고 연애를 할 때는 같은 문화의 사람을 사귈 때 보다 처음에는 서로의 상이함과 특별한 매력에 더 강렬하게 끌린다. 내가 아는 이탈리아 남자들은 일반적으로 한국남자에 비해 여자를 에스코트하는 매너가 참 자상하고 - 물론 그들에게는 몸에 배인 자연스런 태도이고 행위들이다 - 눈치빨이 엄청 빠르다.
하지만 일부 서양 남자들은 동양 여자들에 대한 신비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궁금증과 호기심만으로 대시하는 서양 놈(?)들은 구별해야 할 필요가 있다.
나는 이십 대에 결혼을 하는 주변의 친구들을 보며 성대한 ‘결혼식’과 알콩 달콩 꾸며진 신혼집에 집들이를 가면서 그저 내가 누리지 못했던 보이는 모습에 부러워했던 기억이 있다.
사회적 조건이 대충 비슷한 남녀가 이끌림에 사귀다가 법적으로 허락된 커플로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화려한 결혼식으로 치장한 포장을 하고 두 사람의 새 생활을 시작하는 게 내게는 ‘결혼’ 이란 허상이었던 것 같다.
나는 이탈리아에 20년 이상 살면서 이곳 사람들의 한국과 다른 사고방식과 무엇보다 나의 결혼생활을 통해서 ‘결혼’애 대한 많은 생각들이 바뀌게 되었다.
내가 일하는 곳에는 600여 명의 이탈리아인들이 있고 내가 유일한 한국인이다.
나와 친했던 ‘리타’라는 아줌마는 어느 날 내게 콘훼티 주머니 (이탈리아인들의 결혼식에 기념품으로 마련하는 특별한 사탕 주머니)를 내밀며 나에게 그녀의 결혼을 알렸다. 나는 이 시뇨라 Signora (부인)가 적어도 60세는 되어 보였고 그 아들도 우리 회사에 다녀서 나도 잘 아는 젊은이인데 속으로 깜짝 놀랐다.
“뭐라고, 아직 결혼 안 하셨어요? 줄리오 - 네 아들 아니야”
“응, 이제야 나 결혼하기로 결정했어. 아이들 둘 낳고 산지 35년 됐어”
“그래, 정말 정말 축하해. 놀랍다!!! 멋진 결혼식 되길 바래”
그리고 결혼식 후 며칠 뒤에 만난 그녀는
“비안카, 너무 행복한 결혼식이었어!!! 이렇게 좋을 줄 알았으면 빨리할 걸 그랬어!!”
물론 나이가 지긋이 들은 두 사람이 장성한 아이들과 함께한 결혼식이 이상적인 형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결혼식이라는 겉포장보다 달고 쓴맛과 더불어 오랜 시간을 함께 나눔이 우리의 생에 얼마나 중요한가를 생갹하게 했다.
바야흐로 이제는 ‘시집’을 가고 장인 집에 들어가는 ‘장가’를 드는 시대는 아니다.
우리는 ‘결혼’을 한다. 이 ‘결혼’은 엄밀히 말해 두 사람사이의 법적인 계약관계이다.
하지만 법적인 두 사람의 계약 관계인 결혼 생활엔 무엇보다 ‘두 사람의 일치된 마음과 사랑’ 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사랑엔 너의 이해와 인내보다 나의 이해와 인내가 우선 된다는 사실을 나는 결혼 생활 한참 뒤에야 깨달았다.
이미 ‘아빠’가 되었는데도 ‘결혼’의 화두에 무게감을 심히 느꼈던 그가 드디어 내 손을 잡고 ‘혼인’의 법적 절차를 밟기 위해 구청으로 향하였다.
표지 출처 : photo by Valentin Antonucci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