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출산을 하고 난 다음날은 이탈리아에서는 특별한 일요일로 부활절 일주일 전인 ‘종려주일’이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출산 예정일은 부활절이었는데 배안에서 발길질을 힘차게 하던 아들은 일주일 먼저 저를 감싸고 있던 양수 껍질을 깨고 뛰쳐나온 것이다. 세상에 빨리 오려고 이곳의 대명절인 부활절을 피해 선수 친 것이다.
약간 쌀랑한 봄바람이 불었지만 4월의 따스한 햇빛이 병실 안으로 채우는 아침.
내가 출산 후 갓 엄마가 되었는데 병원에서는 산모를 위한 특별한 식단은 없는 것 같았다.
흔히 먹는 아침으로 홍차와 비스킷 두 쪽이 나왔던 거로 기억한다.
나의 출산 소식을 듣고 로마 시내 한가운데 살던 아카데미아의 친구가 손에 미역국을 들고 나타났다.
그 날이 일요일이라 재래시장도 안 서서 자주 가던 레스토랑에 가서 홍합을 팔라고 해서 홍합으로 끓인 미역국을 가져온 것이다. 아마 20년 전에만 해도 시내에 마트가 제대로 없었던 듯하다. 나는 ‘홍합 미역국’을 보자 고국의 음식을 마주하는 반가움이 빈약한 두 조각의 비스킷이 주었던 왠지 모를 서글픔을 압도하며 친정 식구를 대신한 친구에 대한 감사함까지 교차되어 목멘 미역국을 먹었다.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쨘하게 뜨거워지는 감사한 친구다.
뒤이어 이틀 동안 잠을 못 자고 나의 출산을 뒷바라지했던 아이의 아빠가 미역국을 보온병에 들고 당당히 나타났다.
그럼 그렇지.....
출산했던 날은 이미 저녁이 되었기에 시간이 허락하지 않았고 남편은 내가 출산 전에 가르쳐 줬던 걸 기억하여 소고기 미역국을 만든 것이었다. 고마운 마음에 보온병을 기울여 그릇에 담는데 국물만 있고 미역 건더기가 온데간데없었다.
“ 아니, 미역은 다 어디 있어?”
“ 미역도 먹는 거야? 그건 국물 다시용으로만 넣는 것 아니었어? “
다 ~ 내 탓이오!! 나의 탓이다. 내가 설명을 확실히 하지 않았나 보다.
어쨋튼 남편은 그가 싫어하는 참기름의 향을 참고 나를 위해 미역과 소고기를 달달 볶아 만든 고소한 소고기 미역국을 끓여 주었다. 한국인 아내를 생각하여 만든 미역국이니 앙꼬 없는 찐빵처럼 만들어졌어도 기특한 그의 마음에 후한 점수를 줄 수밖에...
그리고 드디어 내 ‘아들’의 할머니가 그녀의 친손자를 보러 병원으로 오셨다.
내가 임신하고 있을 때는 외면하였던 그녀가 모습을 나타내었다.
정확한 이유는 설명하지 않았지만 이 땅에서 나의 보호막이 될 수 있는 친정 식구 하나 없는 내게 상처를 남긴 것은 당연한 사실이었고 나는 어색한 미소로 그녀의 방문에 응하였다. 그녀는 양손에 모차렐라 부팔라와 그녀가 손수 만든 작은 닭을 넣고 푹푹 고아 끓인 국물이 뽀얀 ‘닭곰탕’ -그녀의 고향인 칼라브리아식 닭곰탕- 을 들고 나타나셨다. 그녀가 나를 받아들이는 시작이었다.
출산 직후 먹었던 산모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빈약한 패스트푸드인 햄버거를 먹은 내게 마치 보상이라도 하듯이 한식과 이탈리아식의 산모용 음식들로 나는 포식을 하였다. 영양가 있는 음식을 섭취해야 내 아이에게 질 좋은 모유를 줄 수 있다는 생각에 나는 나 자신을 스스로 챙기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 산모는 출산 후 삼칠일 21일 동안은 외출도 금하고 항상 미역국을 먹고 몸을 아끼고 공주 같은 대접을 받는 게 지극히 당연한 상식으로 통하는데 내 주변에는 이런 내 모국의 문화를 아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이 나를 외톨이처럼 느끼게 했다. 한국에는 ‘산모 조리원’이라는 곳에서 전적으로 산후조리를 할 수 있는 여건이 되는 장소도 있는데 이탈리아에서는 산모 조리원은커녕 일주일 정도 후면 산모도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출산 몇 개월 전에 다녀 가셨던 한국에 계신 엄마가 다시 올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로마 시내의 한 한국음식점에서 일하고 계시던 조선족 아줌마를 도우미로 구했다.
아침에 두 시간을 할애하여 아이를 씻겨주고 내가 먹을 한식을 준비해주시는 것을 부탁하였다.
그렇게 한 세주 정도 도움을 받고 나는 혼자서 모든 것을 해결하였다.
이제 우리 가족에게 한 식구가 늘어났다.
교집합에 해당하는 ‘자식’이 우리에게 생겨났으니 우리는 당연히 ‘부모’의 자리매김을 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부모의 역할을 하며 나와 다른 다음 세대를 살며 ‘자식’을 통해서 배우고 또 성장한다.
나는 엄마에겐 사랑스러운 딸이었는데 이젠 딸보다 ‘엄마’로서의 역할이 더 중요해졌다는 것을 인지해야 했다.
나 엄마 노릇 잘 할 수 있을까?
처음으로 해 보는 건데.....
어린아이의 소꿉놀이도 아니고.....
이렇게 쪼그만 내 아이를 잘 케어할 수 있을까?
바르고 건강하게 잘 키울 수 있을까?
꼭 쥐고 있는 손을 펴 보아 세어본다.
길고 짧은 10개의 가느다란 손가락. 전부 다 있다.
10개의 손가락이 다 정상이다. 안심이다 ~.
힘찬 발길질로 나를 울렁거리게 했던 인형 같은 핑크색 발도 유심히 쳐다본다.
웬 머리숱은 그리도 많은지...
까만 머리카락이 유난히 많아 신생아실에서도 다른 아기들과 확연히 구별할 수 있었다.
작은 입으로 하품도 하네!
근데 누굴 닮았지?! 쌍꺼풀 없는 긴 눈이 나를 닮은 듯하다.
내 안에 있던 나의 한 부분 - 하지만 실제는 내가 아닌 ‘타인’이 엄마와 아들의 관계로 맺어진 것이다.
그 어떤 혈연의 관계보다 더 밀접하고 끈끈하고 간절하고 소중하고 때로는 설명할 수 없는 관계가 ‘엄마와 자식’ 일 것이다.
나에게 ‘아들’의 탄생은 내 삶에 상당히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나는 이탈리아인의 아이를 낳은 엄마가 된 것이다.
따라서 내가 가지고 있던 유학생 시절의 유효 기간이 제한되어있던 ‘체류 허가증’은 내가 엄마가 된 이후 무제한의 ‘영구 체류 허가증’ 이 되었다. 마치 미국에서 ‘영주권’을 얻은 것이라고나 할까.
자신의 고국을 떠나 수많은 한국인들이 전 세계에 퍼져 사는 글로벌의 시대가 된 요즘.
내가 태어난 땅에서 살 때는 알 수 없지만 나의 터전을 떠나 외국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기본적으로 가장 중요한 게 아마도 자신의 거류를 공적으로 인정해주는 ‘신분증명서’ 일 게다.
아들의 존재는 내가 이탈리아에 거주할 수 있게 하는 서류에 정법한 사유가 된 것이다.
또한 가족 전체가 다른 곳으로 이주하지 않는 한 내가 ‘엄마’이기를 포기하지 않는 한 내가 이탈리아에 거주해야만 하는 반 강제적 조건도 된 것이다.
표지 출처 : photo by Liv Bruce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