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ianca Aug 28. 2020

나의 길을 바꾸게 한 선택


나는 확실히 검증을 하기 위해 산부인과로 향했다.

‘임신입니다,  태아가 안전하게 들어섰네요 ‘


나는 서른 중반이 넘어가는 나이에 처음으로 아이를 가졌다.

하나의 생명을 잉태하는 것은 분명 기쁘고 축하해야 할 일인데 당시의 나의 여러 가지 상황은 그렇지 못했다.

늦은 나이에 힘들게 한 공부가 끝나가는 시점에 있었고 논문을 쓰고 졸업을 하게 되면 이제 실제로 현장에서 일을 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수 있는데 이 중요한 시기에 임신이 되다니.......


임신의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잠시 한국으로 귀국했던  시기여서 지금의 남편 - 당시의 남자 친구 - 에게는 전화상으로 소식을 알릴 수밖에 없었다.  그 무렵 남자 친구는 그의 인생에 두 번째의 허리 디스크 수술을 한 후 직장도 못 나가고 건강을 회복하고 있는 시기였다.   나는 우리의 아이를 가졌다는 이 ‘기쁜 소식’을 전화로 알렸다.


그런데,  남편 왈.

“ 진짜 임신했어...... 축하할 일이네.  그런데 나는 허리 디스크 수술을 했고 회복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은데..... “

그의 대답은 기뻐하는 것보다 오히려 자신의 건강에 심리적으로 허약해진 상태라 그랬는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의외의 반응이었다.

 그래서.....   ‘ 우리의 아이를 어떻게 하라고??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원하지 않는다는 얘기야, 뭐야?? ‘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내 아이의 아빠와 통화를 했는데 별로 반기는 기색이 아닌 불투명한 대답을 듣고 전화기를 놓으며 나는 머리가 텅 비어 진공 상태가 되는 것 같았다.   순간 아무런 사고의 판단을 할 수도 없었고 8월의 후덥지근한 더위에 두 팔은 힘없이 쳐져 엿가락처럼 늘어진 듯했다.


다시 정리해 보자.

나는 언제일지 알 수는 없었지만 내 생애에 꼭 한 번 가져보고 싶은 아이를 내 뱃속에 품었다.

어쩌면 내게는 이런 행운이  ‘오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되었던 적도 많았다.

아니 이건 행운이 아니라 ‘축복’이다.   나도 ‘엄마’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아이의 ‘아빠’가 원하지 않는다.!?


우선 아이의 아빠를 배제하고서 내가 졸업 후 ‘일’을 원하는가,  아니면  일단 ‘아이’를 선택할 것인가?

늦깎이 나이에 공부하느라 머리를 싸매며 여기까지 힘겹게 지나온 시간들이 순간 나의 머릿속으로 필름처럼 나를 할퀴고 지나갔다.    


한편으로 내가  이탈리아에서 ‘ 이탈리아인의 아이를 낳는 것’을 선택한다는 의미는 ‘나는 이탈리아에 정착하게 된다’라는 게 십중팔구로 확실해지는 것이다.   내가 로마인인 남자 친구와 2년 정도를 사귀면서 계속 머릿속에서 고민하던 부분이었다.   내가 타국에서 말뚝을 박고 ‘로마댁’이 되어 산다!?  


photo by Juliana Malta. on Unsplash


아무리 내가 언어를 노력해서 잘 배운다고 해도 그들처럼 말할 수는 없을 것이고  나는 적응력이 비교적 뛰어난 편인데도 한국에 비해 모든 면에서 템포가 한참 느린 이탈리아의 시스템은 답답할 때도 많았다.   나를 끔찍이 아끼는 엄마를 9000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 두고 나 혼자 이 낯선 땅에서 뿌리를 내려야 하나.....   당시에는 전화 통화도 그리 쉽게 하지 못했던 때였다.   한국행의 비행기표도 만만치는 않은데 얼마나 자주 한국을 가 볼 수 있을까?


또 다른 고민거리는 나는 ‘아이’를 선택하게 되면 졸업 후 바로 몇 달뒤 출산을 하게 될 테니 전문적인 일을 하는 것은 포기해야 하는 것이었다.


‘ 너,  이렇게 주저앉으려고 코피 터지게 공부했어.   이제까지 쌓은 실력을 이제는 펼쳐 보일 때잖아. ‘


그래  이제 몇 달 후 논문만 쓰고 통과되면 내가 원했던 목표는 달성하고 그다음부터가 진짜인데.

하지만,  내가 무슨 권리로 나에게 온 이 ‘생명’을 없었던 일로 만들 수 있단 말인가.    

한 번 더 아이의 ‘아빠’와 통화를 했지만 확실한 답변을 들을 수 없었다.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선명하게 아이의 ‘엄마’가 되기로 마음을 굳혔다.

지금의 ‘기회’가 내게 언제 또 올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수록 더더욱 내 뱃속의 ‘아이’가 내게는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고 내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  어떤 것도 내 몸안의  한 ‘생명’보다 내게 더 소중한 것은 없었다.   나의 피와 살을 직접 나누고 있는  내 안의 볼 수 없는 ‘타인’이  ‘타인’의 아빠보다 몇 곱절의 의미로 내게 다가왔다.


만일 아이의 ‘아빠’가 원하지 않는다면  ‘내가  내 새끼 하나  못 키우고 살겠어’  

겁도 없이 용감무쌍한 배짱으로 무장이 되어갔다.   간이 배밖에  나올만한 이런  ‘용기’가  어디서 나왔는지...   

지금 생각해도 모르겠다.


나는 두 어번의 통화를 끝으로 다시 연락을 취하지 않고 - 내 뱃속의  ‘아이’는  아빠와 상관없이 내가  알아서 한다 - 는 야멸찬 생각을 갖고 로마로 향하는 비행기를 탔다.

로마의 피우미치노 공항에 도착하여 혹시나 하는 마음에 두리번거려 보았지만 아이의 ‘아빠’는 보이지 않았다.

마음을 더 굳게 다져먹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오만가지의 상념에 젖었다.


일단은 최상의 논문으로 공부했던 마무리를 잘하고 싶었다.

미리 준비해 두었던 자료로 논문을 쓰고 디자인을 하면서 속이 역겹고 모든 냄새에 초민감 반응을 보이는 임시 초기 증상이 나에게도 찾아왔다.    거북한 속과 함께 이국땅에서 홀로 남겨진 것 같은 외로움이 증폭되어 나를 한없이 곤두박질치게 했다.   그럴수록 정신을 차리고 산모로서의 마음가짐을 평안히 하자고 스스로에게 위로를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찾아왔다.  언제나 그랬듯이 웃는 얼굴에 디스크 수술 후 많이 회복된 모습이었다.

내가 로마로 돌아오던  날 - 공항에 마중을 나갔는데 나를 못 찾았다고 했다.   알고 보니 도착시간을 잘못 알고 갔었다.

우리는 당연히 심각하게 우리의 ‘미래’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고 그도 ‘아빠’가 되기로 마음을 굳혔다.

부모가 된다는 것에 약간의 두려움이 있었던 당시의 남편은 나름대로의 심적 갈등을 내게 털어놓았다.

그는 당시 마흔도 넘은 나이였는데 부모의 자격 조건이라 할 수 있는 일종의 ‘책임감’ 이 무엇보다 그를 옭아매었던 것 같다.  

그가 나보다 나이가 9살이나 많아서 훨씬 어른이고 책임감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은 나의 환상이었다는 것을 깨트려준 일이었다.   

나는 그 이후 남자들의 나이와 그들의 성숙도나 책임감은 꼭 비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고비고비 넘어야 할 산이 내 앞에 펼쳐져 있었다.

논문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졸업하기,   ‘아이’의 출산과 양육....

그리고  당연히 ‘결혼’의 사회적 제도 안에서 아이의 아빠에게 법적인 ‘아내’가 되는 일.


일반적 잣대로 비추어보면 순서가 좀 바뀌었을 뿐이었다.









표지 출처 : photo by Sincerely Media on Unsplash







이전 03화 무대 의상 디자인의 꿈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