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5일은 천주교 국가인 이탈리아의 큰 축일 - 성모승천일 (Ferragosto : 훼라고스토)이다.
이 성모승천일을 전후로 전 이탈리아는 여름 휴가의 절정을 맞는다.
내가 사는 로마도 도시를 탈출한 많은 로마인들 덕분에 텅 비게 되고 시내는 주로 외국 관광객들로 채워진다.
물론 올여름은 코로나의 여파로 시내에는 외국 관광객이 거의 없긴 하지만 보통 많은 가게들이 휴가로 이 시기에 영업을 중지하며 온 도시가 마비된 듯이 멈추어 선다.
나와 남편에게 8월 15일은 우리가 만남을 시작한 날이기도 하다.
남편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로마에 온 지 두어 달이 지난 그야말로 낯설음이 채 가시지 않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색다르고 다른 문화에 적응하기 바쁜 시기였다. 이태리어를 배우기 위해 언어 학교에 다닐 때 친분이 있었던 대만 출신의 부인(사브리나)이 자신의 집에 저녁식사를 마련했고 나도 그 자리에 초대를 받았다. 사브리나는 이탈리아 남자 (로베르토)와 결혼을 했고 지금의 남편과 로베르토는 친구사이였다.
나와 부산 출신인 성악 공부를 위해 온 친구, 그리고 나와 한 집에서 살았던 스위스 친구 수잔나와 함께 우리는 포도주 한 병과 꽃다발을 들고 사브리나의 저녁 초대에 갔다. 언어 학교에 다니던 여자 친구 3명을 초대한 사브리나가 저녁식사의 어색한 분위기를 조정하기 위해 남편의 친구도 초청했다.
이 우연한 저녁식사자리가 남편과의 인연을 맺을 시작점이 될 줄.....
남편은 자그마한 체격에 유머가 많고 낯을 별로 가리지 않는 편이며 누구와도 무슨 대화라도 별 스스럼없이 하는 편이다. 첫눈에 보면 한 마디로 재밌는 스타일의 사람일 수 있다. 특히 여러 사람이 있을 때는 분위기 메이커로 손색이 없다. - 내가 이렇게 묘사하는 것은 당연히 긍정적인 시각에서 볼 경우임을 단서로 한다 -
남편은 그의 어릴 적 친구인 사브리나의 남편 로베르토와 특유의 농담으로 어색할 수 있는 자리를 유쾌하게 만들었고 처음으로 보는 동양 여자들에게도 편하게 느낄 수 있도록 대화를 이끌었다. 사적인 자리에서 이탈리아어로 긴 시간 대화를 나누는 것 자체가 신기해서 나는 부족한 언어 실력에도 불구하고 마구 잡이로 현장실습을 했던 것 같다. 문법이 틀리고 악센트도 어색했지만 그동안 책으로 배웠던 문장들을 적용해서 질문하고 대답하고.....
즐거웠던 저녁 식사의 자리가 연이어 두 번 반복되었고 두 번째 저녁 식사 후 남편은 식사 초대의 감사함으로 자기가 아이스크림을 쏠 테니 프라스카티 (로마 교외의 산 언덕에 있는 마을)에 가자고 했다. 프라스카티는 로마 외곽에 성들이 있는 산마을 중의 하나로 로마인들은 더운 여름철이면 산책 겸 시원한 공기를 쐴 겸 저녁에 이런 산마을로 마실을 가는 풍습이 있다. 서울 사람들이 한강 주변에 나와 시원한 강바람을 쐬며 두런두런 수다 떨듯이.
나와 언어학교 친구 2명은 지금 남편의 차로 로베르토와 사브리나는 그들의 차로 이동했다.
우연히도 나는 남편의 옆 조수석에 앉았고 남편은 차에 CD 한 장을 넣었다.
“ 아! 이 음악은 그리스의 뉴에이지 작곡가 Yanni 잖아 “
- Yanni 의 웅장하고 현란하게 시작되는 Santorini 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 어 ~ 비앙카, 너 Yanni 를 아니? 대부분 이탈리아 사람들은 잘 모르던데..... “
- 남편은 직업상 다양한 이벤트 행사들을 해 보기도 해서 대중음악에 대해 꽤나 아는 것이 많았다.
“ 나는 서울에서 Yanni 의 콘서트도 가 본 적 있어 “
- 나는 이탈리아에 오기 전에 세종 문화회관에서 하는 콘서트에도 가본 적이 있었다.
나와 남편은 순간적으로 뭔가의 공통분모를 찾아내고 마치 주파수가 일치하는 끌어당김을 피부로 느꼈다.
프라스카티의 노천 아이스크림집에서 나는 무슨 영문에선지 그날따라 평소에 잘 먹지 않는 ‘딸기’ 맛을 선택했고 내가 내키지 않는 모양으로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을 보던 눈치 빠른 남편이 자기 거와 바꾸어서 먹자 했다.
그래서 나는 남편이 먹던 ‘초콜릿’ ‘커피’ 맛을 먹고 남편은 ‘딸기’ 맛을 먹었다.
남편은 ‘딸기’를 싫어해서 평생 입에 대지도 않는 과일이었다는 것을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야 알게 되었다..
두 번의 저녁과 아이스크림을 함께한 자리가 있었을 뿐 나와 남편은 연락처를 주고받은 적도 없었고 나도 특별히 별다른 의미도 부여하지 않았다. 그 당시 내게는 막 시작한 로마에서의 생활에 내 자신을 적응하느라 긴장해 있었고 언어의 빠른 습득을 위해서 모든 감각 기관을 총동원해 노력하는 중이었다.
그 후 두어 달이 지나 처음 맞는 로마의 더위에 지쳐가고 있을 8월 중순.
사브리나가 그들 부부와 조르조(남편)와 함께 저녁을 먹으려 나가는데 같이 가자 한다.
나는 두 달 이상을 한 지붕 아래서 함께 보낸 정들었던 친구 수잔나를 그녀의 나라 스위스로 보내고 타지에서의 허전함으로 지낼 때였다. 늘어져있던 내게 누군가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작은 기대감으로 나는 저녁 외식에 따라나섰다. 저녁 식사가 끝날 무렵 이들은 모레가 성모승천일로 휴일인데 로베르토의 누나가 있는 바다 마을 타르퀴니아에 간다고 같이 가자고 제안했다.
이탈리아에서는 8월 15일이 큰 축일이라 당연히 공휴일이고 많은 사람들은 휴가지에서 가족, 친구들과 외식을 하면서 하루를 보낸다. 그 무렵 나도 언어학교에서 짧은 방학으로 시간이 여유로울 때였다. 무료하고 연일 계속되는 따가운 더위에 나는 그들의 청량제 같은 제안에 동의를 하고 이탈리아인들의 휴가 보내기에 궁금함과 함께 그들을 따라나섰다.
타르퀴니아에서의 며칠이 남편과의 영원한 여행의 출발이 될 줄 모른 채.......
타르퀴니아는 로마에서 북쪽으로 1시간 반 정도 떨어진 티레노 바닷 쪽에 있다. 에트루리아 20개 도시 중에 가장 강력한 도시였다고 전해진다.
로베르토의 누나와 매형은 타르퀴니아에 별장이 있었고 따라서 여름을 주로 그곳에서 보냈다.
여기서 별장이라고 함은 단순히 두 번째 집의 의미지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호화로운 집으로서의 ‘별장’은 아니다. 이탈리아인들은 경제적으로 형편이 좋은 가정들은 도시에 거주하는 집 이외에 바닷가나 시원한 공기가 있는 산마을에 두 번째의 집을 소유하고 여름철 또는 부활절 방학이나 여유로운 주말들을 보내며 삶의 풍요로움을 위해서 사용한다.
처음으로 보는 여름의 이탈리아 바닷가 풍경!! - 나는 이탈리아로 오기 전에는 바다에서 지낸 경험도 별로 없었고 산을 더 많이 찾았던 기억만 있었는데 이탈리아에서 보는 바닷가의 풍경은 좀 낯설지만 자연을 즐기는 그들의 모습이 당당해 보였다. 반짝이는 모래사장의 바닷가에는 정열된 파라솔들 사이로 많은 사람들이 햇빛을 쐬며 썬탠을 하고 있었고 아이들은 바닷물에 자연스레 물놀이하는 풍경이 평화로워 보였다.
작은 배를 소유하고 있었던 로베르토의 매형은 환영하는 의미로 그의 배에 우리들을 태우고 티레노의 바다 한가운데로 나갔다 수영을 못하는 나만 빼고 어느새 이들은 그 시퍼런 바다 한가운데 첨벙첨벙 들어가서 헤엄치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나는 배안에서 구경꾼이 되어 처음 쬐어 보는 따가운 햇살과 더불어 동심으로 돌아가 바다에 젖어있는 이들을 보며 앉아 있었는데 왠지 멈추어있는 배의 흔들림이 심상치 않게 몸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파도에 출렁이는 배의 진동이 내 온몸으로 전달되면서 머리는 혼미해지고 계속되는 울렁증에 속이 다 뒤집혀 버릴 지경이 되었다.
그 순간......
물속에 있던 사브리나가 갑자기 소리치며 SOS의 신호를 보낸다.
물 안에 급류가 있었는지 갑자기 다리에 쥐가 났는지..... 허겁지겁 하며 휘젓는 팔 동작이 심상치 않았다.
그때 동작 빠른 조르조가 그녀의 남편 로베르토보다도 더 잽싸게 뛰어든다.
그녀를 허겁지겁 위험했던 상황에서 건져내어 배 위로 힘겹게 올려놓음과 동시에 나는 어지럼증과 울렁거림에 내 몸의 통제를 못하고 옆으로 힘없이 스르륵 쓰러져 버렸다. 내 얼굴은 내 이름(Bianca - ‘흰색’의 의미, 세례명)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고 심한 뱃멀미로 거의 졸도한 지경이 된 것이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던 조르조가 얼른 내게 달려왔다.
“ Amore mio, come stai? “ (아모레 미오, 코메 스타이? : 하니, 괜찮아?)
아모레 미오는 직역하면 ‘내 사랑’이라는 뜻으로 연인, 부부 사이에 부르는 ‘여보, 당신’과 같은 애정 어린 호칭이지만, 유달리 감성적인 이탈리아인들은 이 표현을 남발하는 경향이 있다. 그 당시는 이런 이들의 언어문화를 잘 몰랐으니 난 속으로 ‘아니 뭐라 하는 거야, 내가 연인도 아닌데’ 하며 의심스럽게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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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승천일을 함께 보내고 로마로 돌아온 후 조르조는 매일... 거의 매일 같이 내가 홈 스태이 하고 있었던 집에 저녁마다 나를 만나러 왔고 나에게 로마의 구석구석을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