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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ianca Sep 01. 2020

하나님의 선물

잊지 못할 엄마가 된 날


“남자 아이네요...”
초음파를 하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나는 뛸 듯이 기뻤다.

이탈리아에서는 태아의 성별을 알려주는 게 위법이 아니고 본인이 알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출산하기 전에 산모가 품고 있는 생명의 성을 미리 알 수가 있다.

임신 6개월이었다.  

세상이 다 내 것 같았다.   나도 엄마가 된다.
남자아이를 하나 가져 보는 게 늘 바람이었던 나는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내심 콧노래가 나왔다.
나는 딸만 둘의 맏이라 남자 형제와의 차별 대우를 받는 일도 없었는데 어릴 때부터 왠지 마스킬리즘의 이 세상살이가 마음에 거슬리는 일이 많았는지 내가 여자로 사는 게 탐탁하지 않게 생각될 때가 종종 있었다.  그럴 때면 나는 나중에 결혼해서 사내아이를 하나 가지면 좋겠다고 늘 생각했던 것이다.


임신 7개월 후반부터는 조산기가 있으니 의사 선생님이 조심하라고 하였다.

조심한다고 몸을 너무 사리면 뱃속의 아이만 너무 커져서 출산 시 힘들어진다고 하여 열심히 걷기를 했던 동생의 경험을 기억하고 그래도 나는 걷기 운동을 하였다.


배가 많이 나온 마지막 달의 끝자락에 왜 그리 내가 좋아하는 초밥이 그립던지!!

지금은 중국인들이 하는 중식과 일식을 같이 하는 식당들이 유행처럼 많이 번성하고 있지만 20여 년 전 일식집은 로마에서 희귀했고 시내 한 복판에 가야만 초밥을 먹을 수 있는 때였다.  

나는 남산만 해진 배를 안고 지하철을 타고 일식집으로 향하였다.

오랜만에 먹을 초밥을 생각하고 유쾌한 기분으로 도착한 일식집은 굳게 닫혀있었다.

내가 한참을 기웃거리고 있는데 마침 주인인 것 같은 분이 다가와서 오늘이 월요일이라 휴일이라고 했다.

가는 날이 장날!!!  씁쓸함을 머금고 돌아와야만 했다.


배가 불러올수록 울 아들 녀석은 발차기를 그리 많이 하는지 시시때때로 배가 울렁거렸다.

내 몸안에 한 생명이 자라고 있었다.

왼쪽 가슴 아래로 조그만 발이 느껴졌다. - 100%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럴 거라고 믿어졌다.

남편은 마치 말이 뒷발길질 하는 거에 비유하며 신기해했다.


photo by Bonnie Kittle on Unsplash


출산예정일을 1주일가량 앞둔 금요일 저녁.  그날 저녁 따라 왠지 심한 발길질을 해댔다.  

밤 12시경 내가 침대로 다가가 잠자리에 들려는 순간,  앗!!! 하면서 바닥에 따스한 물이 흥건히 고인다.

양수가 터진 것이다.   드디어 때가 왔다.

배가 아픈 증상도 없었는데 일단은 마음을 진정시키고 나와 남편은 미리 준비해 두었던 출산 준비 가방을 들고 차 싯트 위에 수건 여러 장을 포개어 놓은 다음 내가 평소에 다니던 로마 시내 중심의 티베리나 섬에 있는 화테 베네 프라텔리 (Fatte bene fratelli :  로마의 중심에 위치한 산부인과가 유명한 병원 ) 병원으로 향했다.


그날따라 출산 환자가 많아서 내 앞의 5명의 산모도 자리가 없어 다른 병원으로 이송되었다고 한다.

새벽 2시경이 되어 나는 앰뷸런스에 실려 남편 차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화테 베네 프라텔리에서 아우렐리아 병원으로 이송되어 입원했다.   그날 밤을 하얗게 새우면서 남편은 허겁지겁 나오느라고 미처 준비하지 못했던 것들을 가지러 다시 집에 다녀오고 아침이 밝아오며 나는 작은 통증을 서서히 느낄 수 있었다.


점심시간 때쯤 점점 심하게 배가 아파오는데 무엇보다 힘든 것이 호흡이었다.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해 나는 악 소리도 못하고 끙끙거리며 죄 없는 남편을 꼬집어 대기도 했다.

“어떻게 좀 해봐!!  나 더 이상 못 참겠어.  나 노산이라고...

양수가 먼저 터졌으니 한국 같으면 이 나이에 벌써 제왕절개로 끝났을 거야!!”


이 나라에서는 우리나라처럼 제왕절개를 쉽게 결정하지 않는 것 같다.

양수가 터지고 벌써 12시간이 지났다.  

내가 생각하기에 엄청난 양수가 이미 몸 밖으로 나왔는데 어떻게 자연분만이 가능할까?

한 간호사가 오후 2시에 의사의 교대시간에 교대한 선생님께서 제왕절개의 여부를 결정할 거라고 했다.


통증이 심해질수록 정신은 혼미해지는 것 같았고 어느새 나는 산부인과 의사, 간호사, 산파, 심리 상담가, 우리 시누이 등 한 5명 이상이 내 주위를 둘러싸고 분만실에 누워있었다.   가족 중 한 사람만 분만실에 있을 수 있는데 나는 우리 시누이를 원했다.  사람 좋은 우리 시누이는 덩치에서 보는 푸근함만큼 나에게 위로와 힘을 다독여 주는 말을 잘했다.  이 일을 두고두고 지금까지도  우리 시누이는 새로운 조카의 탄생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준 나의 결정에 특별함을 가지고 있다.



토요일 오후 다섯 시 오십 분!!

“으~아 앙”  하는 우렁찬 소리와 함께 까만 머리카락의 숱 많은 아이가 불그스레한 얼굴로 모습을 내밀었다.

새 생명이 탄생한 것이다.  내 뱃속에서 품었던 생명이 세상으로 나왔다.

이처럼 신통 방통 한일이 또 있을까.  그 어떤 무신론자도 신의 섭리를 무시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 아 ~  하나님,  감사합니다!! ‘   ‘ 나도 해냈습니다!! ‘


모든 힘을 죽기 살기로 출산에 쏟아부은 나는 기진맥진해져 파김치가 되었고 분만실에서 나와 배고픔을 느꼈을 때는 이미 병원의 저녁식사 시간이 훨씬 지난 때라 남편은 내 부탁을 받고 근처의 중국집에서 국물이 있는 탕을 사려고 나갔다.

그 순간 갑자기 집중 소나기가 한 바탕 휩쓸었고 병원 근처가 외진 곳이라 식당들도 별로 없고 하여 남편은 맥도널드에서 산 햄버거를 가지고 내 앞에 나타났다.

출산하고 처음 먹은 게 햄버거인 한국 사람은 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도 배가 고파 대충 먹었던 것 같다.  


그리고 밤 9시가 넘어 첫 수유를 한다고 내 아이를 데려다주었다.

막 태어난 새 생명체의 가녀린 손목엔 내 이름이 적힌 플라스틱 팔찌가 내 새끼라는 것처럼 끼워져 있었다.  

내 이름으로 아이의 정체성이 되어 주었던 그 팔찌를 나는 기억의 한 파편처럼 보관하고 있다.


젖이 있을 것 같지도 않은데 쪼그만 아이는 엄마의 젖을 빨아댔다.  

어떻게 배웠을까?  모든 게 자연적 현상이겠지.  

그렇게 시작한 수유를 나는 두 해의 여름을 거쳐 16개월 동안 하였다.

물론 6개월이 넘어가면 모유의 영양가는 거의 없다고들 한다.  

이탈리아에서는 출산 후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대부분의 엄마들은 수유를 한다.  나도 일을 하지 않는 상황이라 시간 여건도 허락했고 또 감사하게도 모유가 끊이지 않고 공급되었기 때문에 아이와 눈 맞추고 스킨십을 하며 내 것을 줄 수 있는 기회를 맘껏 누렸다.  아이를 가진 엄마가 누릴 수 있는 축복이다.


첫 수유를 마치고 나는 이른 아침의 시간인 한국의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 엄마,  나 아기 낳았어요.  자연 분만했어요 “ 하며 자랑스럽게 말하는데 내 눈에는 어느새 눈물 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서른일곱의 적지 않은 나이에 첫 출산을 했는데도 이국에서 엄마가 되어 보는 순간 나의 엄마가 왜 그리도 그립던지......


“ 그래,  잘했다.  축하한다!!  애썼구나.  엄마도 너무 기쁘다.  말하는 것도 힘들 테니 어서 쉬어라 “

저 멀리 전화 속의 엄마의 목소리를 듣고 아쉬움을 달래며 엄마가 된 첫날밤을 맞이했다.



아들이 신생아때의 신발과 공갈 젖꼭지 출생 직후 차고 있던 내 이름이 써진 플라스틱 팔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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