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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ianca Aug 11. 2020

로마에서의 한 달 살이

이미 오래 전의 일이 되어 버렸다.

나는 서른이 넘어서 결국에는 내가 꿈꾸었던 무대 의상에 관한 공부를 더 하기로 결정했다.


엄마는 내 나이에 보통사람들이 하듯이 내가 결혼해서 한 가정을 꾸리고 평범하게 (내게는 지금도 이 ‘평범’이라는 의미가 어렵다)  엄마 옆에서 살기를 원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거의 결혼을 하기 직전까지도 갔었는데 내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의 반쪽을 만나 천생연분의 인연으로 결혼에까지 이른다는 것이 내게는 쉽사리 이루어질 것 같지 않다는 강렬한 예감이 들었을 즈음 나는 자연스레 전공 분야의 길을 더 깊숙이 닦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그 당시 유명한 패션 학원에서 7년 이상 학원강사로 지내면서 남부럽지 않았지만 반복되는 가르치는 일에 지쳐있었다.  그리고 늦게 시작한 대학원에서 영화 의상에 관한 논문을 쓰면서 자연스레 나의 무대 의상에 대한 꿈은 조금씩 커 나가고 있었다.  패션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패션의 본고장인 프랑스 파리나 밀라노에서의 유학을 누구든지 꿈꾸어 볼 것이다.


그래.  더 늦기 전에 제대로 한 번 도전해 보자.

나는 절친한 선배의 강력한 조언과 항상 꿈꾸어 왔던 예술의 나라 이탈리아에 대한 동경, 그리고 무대 의상에 대한 환상이 결합하여 유학지를 이탈리아 로마로 정하였다.




일단은 무지의 이탈리아어를 공부해야 했다.

이탈리아어는 라틴어에서 파생된 언어의 하나로 성, 수의 구별과 동사의 변화가 아주 복잡하다.  나는 학원을 다니면서 열심히 이탈리아어를 공부했다.  할 수 있는 만큼 언어 공부를 철저히 하고 떠난다는 게 나의 유학 준비의 생각이었다.

나이가 어려서 떠나는 유학은 현지에 가서 적응도 빨리하고 직접 배우는 게 나을지 몰라도 기본 지식이 있는 영어도 아니고 완전 다른 언어를 맨바닥에 헤딩하듯이 무조건 현지에서 배우겠다는 무모함은 내가 보기에는 오히려 시간이 더 걸리는 거라고 생각되었다.  나이 서른이 넘어 굳어진 머리를 깨고 새로운 언어를 배운다는 게 결코 쉽지가 않았다.


이탈리아어 정규 코스를 마치고 나는 일단 한 달의 시간을 투자해 무대 의상을 공부할 학교를 알아볼 겸 로마의 분위기도 피부로 직접 느끼고 싶어 로마로 떠났다.   어학원을 통해 로마에 있는 언어 학교에 한 달 코스를 등록하고 소개해주는 집 주소 하나만을 손에 쥔 채 용감무쌍하게 비행기에 올랐다.

이탈리아에는 그 어떤 지인이나 지푸라기 같은 연고도 없었다.  단지 내가 공부하려는 목적에만 맞추어서 선택했을 뿐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어마 무시한 용기가 어디서 나왔는지.....  내 스타일이 뭔가에 한 번 꽂히면 앞 뒤를 보지 않고 돌격하는 황소 같은 스타일이라 그랬던 것 같다.


지금부터 23년 전  11월 21일 이미 어둠이 짙어진 시각.

나는 낯선 로마의 공항 택시 정류장에 단신의 동양 여자로서 느끼는 약간의 두려움과 경계심으로 긴장한 채 서 있었다.

한국에서 본 여행 안내서에는 ‘흰색의 택시는 타지 마라’고  되어 있었는데 줄 지어선 택시들은 모두 흰색뿐이었다.

몇 대의 택시들을 양보하다가 할 수 없어서 타게 되었는데 택시가 출발하기 직전 앞자리의 조수석에 왠 젊은 남자가 갑작스레 불쑥 타는 것이 아닌가.  아니 이건 또 무슨 황당한 경우인가.?


이제 택시 안에는 운전수와 영문 모를 한 젊은 남자 - 이렇게 두 이탈리아 남자가 나와 동승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갑자기 현기증이 나면서 이 사태를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생각하며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이 두 남자들은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걸 봐서 서로가 아는 사이인 것 같았는데 나는 이탈리아어로 따지고 물을 만큼 언어 실력이 있는 것도 아니라 속앓이만 할 수밖에.  게다가 이상한 점은 아무리 봐도 택시 안에 미터 요금기가 보이지 않았다.   이건 무슨 사기 택시인가??    


나는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제발 아무 일이 없이 내가 보여준 주소대로만 도착하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한참을 달려 내가 원하는 목적지까지 택시는 아무 일 없이 도착했고 내가 궁금해했던 미터 요금기는 택시 안 천정에 붙어있었는데 택시기사는 표시된 금액에 거의 2배를 요구했다.  공항에서 멀다는 이유였다.  


택시 요금은 150,000 리라 -  나는 100.000 짜리 지폐 한 장과 50,000 짜리 지폐를 동시에 내밀고 돌아서는데 택시 기사가 내 어깨를 툭툭 친다.   내가 준 100,000 짜리 지폐는 10,000 짜리라서 내가 잘 못 줬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100,000 만원을 더 주고 계산을 끝냈다.   운이 없게도 초행의 모습으로 어리 버리 해 보였던 내가 관광객을 이용하는 나쁜 사람들의 전형적인 덫에 단단히 걸린 것이다.  속았다는 것을 눈치채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릴 필요도 없었고 돈을 좀 잃었던 게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지폐를 주고받을 때 한 장씩 세면서 전하는 이탈리아 사람들의 습관도 이 일로 확실히 배우게 되었다.

이 에피소드가 로마에 첫 발을 내딛으며 내가 받은 환영 인사!! - Benvenuto (어서 오십시오)!




내가 한 달 동안 있었던 언어 학교에서 소개해 준 아파트에는 스웨덴 여자, 스위스 여자가 한 명씩 이미 거주하고 있었다.

당연히 모두 같은 언어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이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그동안 책에서 배웠던 몇 마디의 인사말을 그들과 교환했고 이들은 먼저 입주해서 나를 반겨주는 친절함으로 12시간의 비행과 시차로 정신이 몽롱한 내게 파스타를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다음날부터 싸늘한 습도로 으슬 으슬 추운 로마 시내를 다리가 아프도록 걸어 다녔다.


처음 보는 시내의 오래된 유적들, 산 피에트리니의 반들 반들한 돌들로 덮여 있는 울퉁 불퉁한 길들,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수 없이 많은 멋진 성당들 - 로마는 시내 전체가 마치 박물관인 듯한 착각이 들게 했다.

스페인 광장의 계단에 앉아  ‘로마의 휴일’에서 나오는 오드리 헵번을 떠올리고 트레비 분수에 동전을 투척하고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내가 그동안 배운 이탈리아어를 로마의 땅에서 말하고 있다는 자체가 신기했다.


photo by Michele Bitetto on Unsplash


언어 학교가 있는 곳은 테르미니 (서울역 같은 곳) 기차역에 가까이 있었는데 유달리 이 근처에는 엄청난 무리의 새떼들이 날아다니는 광경이 지금도 내 기억에 선명하다.


오전에는 언어학교에서 이탈리아어를 배우는데 시간을 보내고 오후에는 주로 학교에서 하는 특별활동이나 (요리수업, 영화 보기 등등) 박물관을 찾아보기도 하고 시내를 쏘다녔다.   처음 살아보는 낯선 곳인 데다 전혀 다른 문화로 내가 혹 실수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긴장감,  언어 이해가 완벽하지 않으니 어쨌든 눈치와 코치로 상황에 예민해짐 등이 나를 피곤하게 하였다.


체류 후 2주가 지났다

내가 한국에 있는 이탈리아 대사관에서 구해온 무대 의상 아카데미아들을 찾아보고 실제적인 정보 수집을 위해 나섰다.

로마의 버스 노선이 있는 지도를 가지고 학교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는데 첫 번째 학교부터 문제가 생겼다.

내가 얻은 정보가 잘못되었는지 주소대로 찾아간 곳에는 학교가 있지도 않았다.

아니 이 정보들이 다 잘 못되었단 말인가.  갑자기 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무엇보다 학교에 관한 정보를 얻으려고 여기까지 왔는데 이게 웬 날벼락인가!!


그러던 어느 날 오후 전화국에서 배포되는 노란색의 두꺼운 새전화 번호부 책이 아파트의 문 앞에 배달되어 있었다.

아!  혹시나. - 나는 기대 반 호기심반으로 패션 아카데미아들의 전화 번호부를 살펴보았다..

내가 가지고 있었던 두어 곳의 아카데미아 주소는 옛날 주소인지 새전화 번호부에는 없었고 대신 새로 얻은 주소와 전화번호를 알 수 있었다.  그 이후 안도의 한숨과 함께 현장 검증을 하면서 여러 학교를 직접 내 눈으로 확인했다.  요즘은 스마트폰에 인터넷이 잘 되어있어서 인폼을 구하는 게 너무 쉬어졌는데 당시는 사정이 많이 달랐다


이제 벌써 3주가 지나가고 있었다.

처음으로 집을 떠나 혼자 밥을 먹고 자취 생활을 해 본거라 나이만 들었지 왜 그리도 나 자신이 어설퍼 보이던지.

어릴 때는 그리도 동경해 보던 혼자만의 생활이었는데 막상 낯선 땅에서 직접 해보니 짧은 시간인데도 만만치가 않았다.  엄마가 해 주시는 따뜻한 밥이 그립기도 하고.  지금 생각해 보면 나이에 비해 엄청 어렸나 보다.

지금처럼  핸드폰도 없을 때였고 국제 전화를 맘 놓고 할 수도 없는 세상이었다.  


나는 10분의 대화가 가능한 10,000짜리 국제 전화 카드 한 장을 사서 공중전화 박스에서 한국의 집에 전화를 했다.

아!  여러 날의 장마 후에 쨍쨍한 햇빛만큼이나 반가운 엄마의 목소리.


“ 잘 있니?  밥은 잘 먹고 다니고.”

“ 네,  잘 있어요.  엄마, 나 내가 원하는 아카데미아 찾았어요!  3학년으로 편입도 가능하다고 했어요!”


“ 그래,  잘했다.  그런데 요즘 여기는 난리가 났다.  IMF 라나!!  경제 사정이 엉망이 된다고 시끄럽구나 “


아니 웬 날벼락!!   아이 엠 에프 -  이게 무슨 소리라지??

한국에 돌아가면 제대로 유학 절차 밟고 서류들 준비해야 하는데....  유학 비용도 만만치 않을 텐데.....


난 꼬박 한 달의 초겨울을 로마에서  홀로 지내기를 연습해보고 12월 내 생일날 한국의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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