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녔던 무대의상 아카데미아는 오페라 <토스카>에서 여주인공이 뛰어내리는 성벽의 배경으로도 유명한 산탄젤로 성 (Castel Sant’Angelo - 천사의 성)의 건너편 테베레강가에 위치하고 있었다. 바티칸에서 불과 5분 정도의 거리로 로마의 시내 한가운데에 있는 학교를 다니며 나는 역사와 미술의 도시에 나도 함께 호흡하고 있다는 뿌듯함에 취해 있었다.
직접 내 눈으로 미리 답사하고 한 달 동안 예행연습으로 살아본 도시에서 나는 내가 꿈꾸었던 공부를 시작했다.
운 좋게도 한국에서의 경력을 인정받아 4년 과정인 학교를 3학년에 편입하여 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12살 아래의 띠 동갑내기들과 머리를 맞대며 그것도 온전치 않은 이탈리아어로 늦은 나이에 공부를 하는 것이 만만치는 않았다.
보통 예술 쪽의 공부를 하는 유학은 ‘실기’ 위주로 하기 때문에 언어가 주는 어려움에서 조금은 가벼운 게 상식적인데 내가 다녔던 학교는 의외로 실기보다 이론수업의 비중이 더 클 정도였다.
‘복식사’ ‘미술사’ ‘영화사’ ‘연극사’ - 이런 과목들은 무대 의상 디자인을 하기 위한 기본적인 수업들이었다.
무대의상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의상과 관련된 story 가 기본으로 깔려 있어야 되는 것이다.
물론 실기 과목인 의상 디자인과 텍스타일 수업은 엄청 분량이 많은 숙제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일요일도 맘 편히 쉬지 못하게 만들었다.
나는 한국에서 옷을 제작하는 실기수업 - 옷의 패턴을 뜨고 실제로 봉제하여 완성까지 하는 과정 - 을 가르쳤기 때문에 의상을 제작하는 데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내가 상상했던 유학도 실기에 치중한 유학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학교 수업의 이론 수업은 마치 국립 미술원을 다니는 것 같았다.
그중 가장 힘들었던 수업은 까칠한 성격으로 유명했던 젊은 여교수님의 ‘미술사’ 시간.
이 수업은 기본적으로 당연히 불을 끈 상태에서 슬라이드 수업으로 진행되었다.
학교 수업의 초창기에는 말하기도 듣기도 서툰데 불까지 끄고 따르르 총알처럼 굴러가는 발음이 내 귀에 자연스레 들려 올리는 만무 했다. 교수님은 그림이나 조소, 건축물 등의 예술 작품들을 하나씩 디테일하게 설명하며 수업을 진행해 갔다. 이해할 것도 같다가 때때로 처음 들어보는 단어들이 나의 뇌로 투입되지 않고 강의실에 둥둥 떠다니며 내 주위를 맴돌면 나는 지나간 말들이 풀리지 않아 ‘그렇다 치고?? ‘ 를 스스로에게 명령하지만 이미 작은 공백이 생긴 수업은 듬성듬성 구멍이 난 채로 끝날 때가 많았다.
교재는 있었지만 나에게는 어렵기 그지없었고 심지어 ‘미술사’ 교재 한 페이지를 읽는데 초창기에는 40분 정도가 소요될 지경이었다. 시험은 300페이지가 넘어가는 분량의 책 한 권인데 한숨만 나왔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지. 나는 한국인 특유의 악착 근성으로 모든 방법을 총동원했다.
수업시간은 그 당시의 카세트 녹음기로 녹음을 하고 같은 클래스 친구들의 노트를 빌려서 복사를 하고 그 노트 필기의 꼬불탕한 글씨체를 재해석하느라 또 많은 시간을 쏟으면서 나름대로 할 수 있는 모든 역량을 쏟아부었다.
머리에서 쥐가 날 지경이었다.
외국어로 공부하는 게 정말 끔찍한 인내와 노력을 요한다는 것을 체험하고 내 나라의 말로 공부할 때 좀 더 잘할걸!!
이런 필요 없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실기 수업인 디자인 수업은 쉬웠는가?
디자인 수업은 특별한 스킬을 배운다기보다는 주제나 컬렉션에 맞게 엄청난 분량의 디자인을 해야 하는 것이었다.
디자인을 하는 테크닉적인 면에서 어떤 재료로 어떤 방식으로 그리는가는 각자의 몫이다.
각자가 알아서 무슨 재료나 어떤 방식으로든 창의적으로 디자인하는게 이들의 수업 방식이랄까. 뭔가의 새로운 스킬을 배울것이라고 생각한 나의 예상은 어김없이 빗나갔다.
나는 나름대로의 의상 디자인을 하면서 기술적인 측면보다는 창의력의 빈약함과 이탈리아 문화나 역사에 대한 나의 무지함이 하나씩 드러나는 것 같아 나 자신에 대한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이탈리아라는 나라를 소개할 때 흔히들 ‘예술의 나라’라는 표현을 많이 한다. 내가 이 나라에 살다 보니 더 절절히 동감할 수밖에 없다. 의상 아카데미아의 학교 친구들이야 당연히 소질이 있고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하겠지만 내가 보는 평범한 이탈리아인들도 사고방식에서부터 ‘예술을 할 수밖에 없는 민족’이라고 생각되었다.
예술의 기본이 창조에서 출발하고 예술인의 자질이 무한한 수용성이 있는 광활한 의식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고 전제할 때 나는 과연 디자이너의 자질이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묻기 시작했다.
성냥갑 같이 네모 반듯한 아파트를 숲처럼 만드는 나라, 연예인들의 작은 소품 하나도 방송을 타면 순식간에 유행몰이에 휩쓸려가는 사회에서 자란 내가 얼마나 창의력이 있을까?
더군다나 내가 자란 세대는 일방적인 주입식 교육을 받았고 도덕과 윤리 수업을 받으며 사회의 획일화에 동질성이 떨어지면 마치 소외되는 분위기에서 자랐다. 이런 밑바탕이 깔려있는 내가 텔레비전에서 이탈리아 군인들마저 삐뚤빼뚤 줄 맞추지 못하고 행군하는 모습이 우스워보이는 것은 당연했다.
이탈리아인들은 각 개인의 성향이 강한 탓인지 한 틀에 자신을 똑같이 맞추는 것을 체질적으로 못한다.
우리는 이탈리아가 패션의 나라라고 알고 있지만 실제로 내가 살아보는 이탈리아는 어떤 유행이나 사회적 이슈에 많은 이들이 획일적으로 휩쓸려 가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들 중 많은 유명한 이탈리아인들의 활약이 돋보이지만 이탈리아내에서는 서민들의 실생활과는 별로 상관없는 듯이 보인다.
이탈리아의 대학교들은 수업 코스가 끝났다고 모두가 동시에 시험을 치고 모두가 함께 학년이 올라가는 것은 아니다. 코스는 끝나도 시험은 개인적으로 치러야 하는 경우가 많고 과정이 전부 끝나도 시험을 다 통과하지 않은 학생들도 있다. 따라서 대학도 입학은 비교적 쉽고 졸업이 훨씬 더 힘들다. 전공과마다 다르지만 인문계열의 경우에는 구두시험이 대부분이고 따라서 각 개인마다 일대일로 교수님과 마주 앉아 시험을 치러야 한다. 따라서 까다로운 교수에게 걸리면 그 시험이 상대적으로 더 어려울 수도 있고 문답식 구두시험은 그야말로 실력이 확 들통날 수 있는 방식이다.
나도 어설픈 언어 실력으로 출발했지만 심지어 복식사 구두시험에서는 틀리게 대답하기도 했는데 인자하신 ‘복식사’ 할아버지 교수님은(마음씨가 너무나 착하고 인자하신 분으로 기억에 남는다) 시험중에 내게 직접 그림으로 그려가며 설명하기도 했다. 특히 ‘미술사’ 시험에서 책을 달달 외워 말하는 나를 보고 깐깐했던 교수님은 ‘네 말로 풀어 설명하라’고 핀잔을 듣기도 했지만 나의 피나는 (...) 노력을 높게 보시고 만점을 준 일이 나에 대한 자부심을 회복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사건이었다. - 나의 자랑질에 양해를 구함 .
나의 자질과 한계를 스스로에게 테스트해보며 나는 드디어 2년 동안 힘들게 따라갔던 의상 아카데미의 수업과 모든 시험 (문답식 구두시험까지 )을 통과했다. 어깨를 누르고 있던 무거운 짐을 벗어버린 듯했다.
한여름의 태양이 로마를 달구고 있었지만 나는 마치 한 줄기의 바람 속에 있는 것처럼 시원함을 느꼈다.
이제 논문만 남았다. 고지가 저만큼 내 앞에 다가왔다.
논문 준비의 기초 공사를 마쳐놓고 8월 한 달간을 한국에서 보내기 위해 귀국했다.
짧은 시간 동안 못 만났던 친구들도 만나고 엄마가 해 주시는 집밥을 먹으며 오랜만에 고국에서의 푸근함에 있었다.
그런데 좀 이상했다..
아니 왜 매월 찾아오는 그분이 소식이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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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스트 양성 반응. - 임신이다!!
앗!! - 내가 아이를 가졌다고.....
나는 아이 갖기가 어려울 것 같다는 근거 없는 두려움이 늘 있었는데 그래서 좋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이제 공부가 끝나면 정말 현장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데 하필이면 이 시기에....
나, 어떻게 해야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