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부담스러운 제목이다. 서점에서 이 책을 집어 드는 순간 제목 때문에 망설였고, 절대 사지는 않겠노라 생각했다.
그러다 서문을 서서 읽고 이끌리듯 앉을자리를 찾아 스무 장 이상을 내리읽었다. 이미 읽은 책 분량을 생각해도 사기는 아깝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지 5분도 지나지 않아서 나는 이 책과 또 다른 책을 들고 계산대 앞에 서있었다.
사실 나는 책을 좋아하고 책 읽을 때가 행복하며 심심하면 서점에 가곤 한다. 그렇지만 다른 이들에게 책을 많이 읽으라고 강권하는 사람들이나 아이들에게 독서를 강조하는 부모를 달가워하지는 않는 편이다.
자신의 아이가 책을 너무 안 읽는다며 어떻게 해야 책을 좋아하는 아이로 키울 수 있느냐, 는 고민 상담을 종종 받는다. 그럴 때 나는 왜 꼭 책을 많이 읽는 아이가 되어야 하느냐고 되묻곤 한다. 아이들이라면 지치도록 뛰어노는 것이 책 한 권 읽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견은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초등학교 때까지는 골목에서 지치도록 놀았다. 고무줄놀이를 하다 어둠이 찾아오면 고무줄이 보이지 않아 구멍가게 근처에서 흐린 불빛에 의지하면서라도 끝까지 놀았다. 숨이 턱끝에 차오를 때까지 다방구를 하며 온 동네를 헤집고 다녔다. 반 친구들과 놀기도 했고 시간 되는 대로 만난 동네 꼬마 동생들과 한데 어울려 놀기도 했다.
공기놀이하기 좋은 돌을 찾기 위해 고개가 아프도록 땅 만보고 다니기도 했다. 하도 공기를 하다 보니 오른손은 해도 해도 끝나지 않아 왼손으로 대결을 벌일 때도 많았다.
둘째 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 때인가 3학년때인가 그즈음 반에서 공기 대회가 열렸다. 첫째에 비해 공기를 그리 잘하지 못하는 둘째는 예상을 깨고 많은 게임을 이기고 왔다. 신기해하는 우리를 보며 아예 공기를 못하는 아이들도 많다며 어린 마음에 의기양양해했다. 이 기회에 공기를 배운 아이들이 생겼다니 반갑기도 했으나 한편으로는 씁쓸했다. 아이들은 대체 무슨 놀이를 하며 노는 것일까.
책을 읽지 않는 것보다 나는 아이들이 놀이를 잃어버리는 현실이 더 안타깝다. 물론 런닝맨 놀이 등 놀이터에서 새로운 놀이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 때나 놀 수 있는 건 아니다. 친구가 학원이 끝나고 다음 학원에 가야 하는 사이사이 서로 연락을 해야 비로소 놀 수 있다.
내 어릴 적에는 놀다 놀다 지쳐서 심심해지거나 비가 와서 바깥놀이를 못 할 때 책을 읽었다. 읽을 책이 지금처럼 지천에 널려 있지도 않았다. 운 좋게 생긴 몇 권짜리 전집을 아껴가며 야금야금 읽었다.
만화책방에도 종종 가서 그 긴 시리즈를 한 권씩 읽어나가는 재미도 만끽했다. 용돈을 어렵사리 모아 버스를 타고 나가야 하는 서점에서 책을 사기도 했고 꼭 갖고 싶은 만화책을 사기도 했다. 돈은 없었으나 노는 시간이 풍부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으리라.
각설하고, 그런 내가 책을 사는 일에 회의가 든 것은 책장에 있는 내 책들을 솎아내면서부터다. 해마다 책꽂이에 넘쳐나는 책을 정리하고 재활용 쓰레기로 버릴 때마다 잠깐씩 그런 생각을 하긴 했다.
이제는 책을 덜 사야지. 빌려봐야지. 이렇게 많은 책들을 만들기 위해 사라졌을 무수한 나무들에 대한 상념에도 잠시 빠진다. 그러면서 또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면 도서관에서 빌려 읽는 것만으로는 만족을 못하고 서점 신간 코너를 기웃거리게 되는 것이다. 책의 저자와 차 한 잔을 마시고 그 값을 지불한다고 생각해보라. 어찌 아깝겠는가.
알랭드 보통을 불러내고 박시백 화백을 불러내며 로알드 달,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황석영 작가, 안도현 시인 등등 그 누구든 어디서든 내가 원하면 함께 할 수 있다니 멋지지 않은가, 말이다. 그래서 기꺼이 그들의 찻값을 내는 걸 주저하지 않는 것이다.
헌데 이번에는 책을 읽는 것이 사치라는 생각이 꽤 오래 나를 잠식하고 말았다. 그 시간에 좀 더 생산적인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 그 시간에 뭔가 청소를 하거나 아이들 간식을 좀 만들어 준다거나 뭐, 현실적인 어떤 행동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그런 자괴감에 빠졌다고 해야 하나.
마치 책을 읽는다는 행위가 현실성이 없는 꿈결 속을 헤매는 몽상가의 그것처럼 느껴졌다. 노모가 정성껏 키우고 기른 상추를 일일이 뽑고 다듬어 딸을 위해 건네주시는 순간, 그 신성한 노동 앞에서 나는 초라해졌다.
회의 때 갓 구운 빵을 가져오는 바지런한 지인 앞에서 마늘쫑을 담아 예쁜 유리병에 담아 선물로 주는 둘째의 베프맘 앞에서 나는 왠지 고마우면서도 미안한 마음이 함께 일었다. 제사를 모시고 식혜를 담고 만두를 빚어 넉넉함을 베푸는 이들 앞에서 나는 고마우면서 작아졌다.
뭔가 나도 책을 읽고 다시 새로운 길을 내려고 하기보다 이런 일상을, 이런 현실을 가꾸고 변화해 나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 소용돌이쳤다.
그런 즈음에 나는 <독서는 나를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를 만나게 된 것이다. 그러니 어찌 그 책을 사지 않겠는가, 말이다.
나는 다시 책의 맨 첫 장에 서명을 하고 밑줄을 그으며 맨 뒷장에는 메모를 했다. 웬만하면 앞으로는 하지 않겠다는 이 행위(서명을 하고 밑줄을 그으면 중고서점에 팔기도 어렵다. 책을 재활용 물품으로 내놓을 때도 서명이 있는 채로 보내기가 찜찜해 일일이 첫 장을 뜯어야 한다.)는 많은 것을 함축하는 행동인 것이다.
다방면의 책을 참 많이도 읽어대는 저자는 나와 책 읽는 스타일은 많이 다르다. 하지만 내가 잊고 있었던 중요한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그동안 내가 읽고 만난 수많은 작가들에게 마음의 빚을 지고 있었다는 것 말이다.
힘든 순간 유일하게 쉬는 화요일 찾았던 서점이, 책이 내겐 오아시스였었다. 힘들 때 혼자서도 잘 이겨내고 쿨하게 잘 털어냈다고 생각했는데, 난 혼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내가 초라한 순간에도 나를 믿고 괜찮다고 당당할 수 있었던 것도 사랑을 아낌없이 주신 부모님뿐 아니라 그때 만난 나와 비슷한 처지의 주인공 덕분이기도 했을 것이다.
<독서는 절대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의 저자인 사이토 다카시 교수는 나의 이런 망각을 새록새록 되살아나게 했다. 그래서 늘 외롭지 않았구나. 그래서 그렇게 늘, 혹은 대체로 즐거웠구나. 누군가의 섣부를 위로가 필요치 않았던 것도 누군가의 평가가 그리 궁금하지 않았던 이유도, 어쩌면 그래서 였구나.
또 한 가지는 책을 멀리한다고 해서 보다 건설적인 일을 하게 되는 건 아니라는 깨달음. 그래서 나는 오늘도, 아마 내일도 책을 읽을 것 같다. 살림에 좀 소홀하면 어떠랴. 어찌 되었던 나는 일상을 굳건히 버티고 있고 그러면서 여전히 꿈을 꾸고 있으니, 좋지 아니한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