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는 살림 천재?

언니의 집안일 4

by 별별

집안일을 내 일이라 여기자 어떤 책임감같은 게 생겨났다. 좀 더 체계적으로, 제대로 집안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오래 전 엄마께 청소를 어떻게 하시는지 여쭤 본 적 있었다. 부모님이 살고 계시는 고향집은 넓지만 항상 깨끗한데, 거실과 부엌은 항상 문을 열어놓는데도 먼지가 거의 없고, 자주 반찬을 만드시고 국을 끓이시면서도 설거지가 쌓여 있는 걸 보지 못했다. 엄마는 게다가 틈만 나면 옷방, 창고방, 베란다 등 구석구석 들었다 놨다 하시는데도 그 정리가 하루를 넘긴 적이 없었다. 내가 존경하는,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 우리 엄마는 어떻게 집안일을 하고 계셨던 걸까.


"엄마, 궁금한 게 있는데요, 청소는 얼마나 자주 하세요?"

"딱히 정해진 건 없는데."


딱히 정해진 건 없는데... 예상 외의 답변. 좀 실망스러웠다. 원칙도 없이 지금까지 해 오셨다는 걸 믿을 수 있을까? 그냥 집안일을 하시는데 우리집은 항상 깨끗했단 말인가?


"무슨 요일에 청소 해야겠다고 하면 스트레스 받아서. 그냥 그때그때 지저분해 보이면 하지."


전교 1등에게 공부 비결을 물어보면 "특별한 공부법은 없고 틈날 때마다 교과서를 봤어요."라고 말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나는 엄마 딸 맞나? 하지만 조금씩 이해가 된다. 날짜를 정해 놓으면 스트레스 받는다는 점에서 역시 엄마딸 맞다. 다만 우리 엄마는 '그때그때'가 아주 잦은 시간일 뿐, 나는 좀 드물었을 뿐.


어렴풋이 집안일을 '그때그때 하면 되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언제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없다. 그래도 눈에 보일 정도로 무언가 거슬리게 한다면, 예를 들어 바닥에 머리카락이 보일 때 (애써 외면했지만) 저기서 또 보일 때, 그럴 땐 청소를 마음 먹는다. 그리고 일단 집안일을 시작한다면 내 나름대로 규칙도 있는 편이다.


그래, 집안일을 제대로 하고 싶다는 열정이 솟는 지금, 이쯤에서 한번 집안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제대로' 점검해보고 싶었다.

<나의 집안일 순서>

1. 그때그때
- 바닥을 쓴다. 바닥을 닦는다. 설거지를 한다.

2. 빨래가 쌓였다면
- 세탁기를 돌린다. 쓸고 닦는다. 설거지를 한다. 다 된 빨래를 넌다.

간단하잖아? 너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으니 좀 더 자세히 말해 볼까?





1) 먼저, 세탁기를 돌린다.

빨래를 툭 털어놓는 것으로 청소를 시작한다. 세탁기가 붕붕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면 이제부터 청소가 시작되는 것이다. 세탁기와 함께 청소를 하는 듯한 동지의식까지 느낄 수 있다.

속옷류/ 겉옷류를 따로 분리해서 빨래한다. 각각의 빨래 양이 적어지는 대신 '자주' '절약모드'로 빨래를 한다. 절약모드가 불안하다면 물 양을 높이면 된다.


2) 먼지포로 바닥을 쓴다.

진공청소기보다 먼지포 밀대를 추천한다. 진공청소기는 무겁고 모터에서 미세먼지가 날린다고 한다. 그리고 이리저리 코드를 뺐다 꼽았다 몸통을 들고다니기 번거롭다. (무선청소기가 있다면 말리지 않겠으나!) 먼지포 밀대는 무척 가볍고 슬렁슬렁 해도 먼지가 잔뜩 묻어나와 뿌듯함을 느낄 수 있다.


3) 바닥, 책상 정리를 한다.

처음부터 ‘정리’를 목표로 하면 정리가 큰 일처럼 느껴진다. 나는 주로 바닥을 쓸면서 그때그때 보이는 지저분한 것들을 정리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어느새 책상 정리까지 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다.


4) 바닥을 닦는다.

밀대 전용 물티슈를 팔긴 하지만 시중에 파는 싼값의 물티슈 두 장으로 느낌을 살려 본다. 한 번 닦고 뒤집어서 두 번 닦는다. 사실 닦는 건 자주 하진 않는데 미세먼지가 심하다 싶으면 닦는 건 필수인 것 같다.


5) 설거지를 한다.

손에 물 묻히는 걸 싫어한다. 사실 그래서 설거지는 제일 하기 싫은 집안일이다. 하지만 그때그때 하지 않으면 특히 여름날에는 날파리가 꼬이기 쉽다. 설거지를 다 하고 반드시 개수통을 비워야 한다.

- 좀 기름진 때가 많다 싶으면 물을 끓여서 부어놓고 잠시 기다린다. 그러면 정말 슬쩍 문지르기만 해도 기름때가 없어진다. 이건 외국에서 홈스테이할 때 아주머니께 배운 것.


6) 다 된 빨래를 넌다.

절약모드로 속옷류 > 겉옷류 순으로 빨래를 각각 돌리고 나면 1시간 정도가 지나게 된다. 설거지를 끝내고 손을 깨끗이 씻고 빨래 널 준비를 한다. 이것들을 널면서 비로소 청소는 마무리된다.


7) 쓰레기통을 비운다.

그리고 외출할 때 음식물, 재활용 쓰레기를 버린다. 우리집은 좁아서 이것들만 버려도 온 집 안이 넓어지는 느낌이다. 역시 정리란, 버리는 것이랬다.


(추신. 화장실 청소는 샤워하고 난 뒤에 그때그때 한다. 왁스로 하수구를 청소하거나 물청소 하는 건 가끔... 일 년에 한 번?)




어느 정도 규칙을 가지고 청소를 하는 나 자신이 스스로 뿌듯했다. 나는 이제 살림 천재가 될 거야! 왜냐구? 엄마 딸이니까.


그러던 어느 날, 미세 먼지 없는 맑은 날이었다. 오늘 같은 날은 빨래를 하기 위해서 있는 날이라고 느낌이 오는 날. 난 빨래를 하기로 했다. 빨래통을 탈탈 털고 세제를 넣고~ (향기가 좋군) 뚜뚜뚜 프로그래머가 컴퓨터를 만지듯 똑부러지게 나의 절약모드를 가동해 세탁기를 돌리기 시작했다. 후훗, 이런 날을 놓치지 않고 빨래를 하고 있는 내가 너무 똑똑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런데, 다 된 빨래가 너무 향이 나는 게 이상했다. 사실 이건 며칠 전부터 느꼈던 거다. 불현듯 스쳐 지나가는 불안한 느낌.


"근데... 아무리 봐도 세제란 말이 없는데~ 이거 섬유유연제 아니야??"

"그런가?? 그렇네??"


충격이다.

알고보니 그동안 내가 했던 빨래는 모조리 말짱 꽝이다.


그러니까, 정신을 차리고 말해보자면 나는 빨래를 섬유유연제만으로 했던 것이다. 내가 없는 동안 동생은 피죤(섬유유연제)으로 빨래를 했고, 나도 별 생각 없이 피죤으로 빨래를 했던 것이다. "요즘 세제는 액체로 나오네~ 잘 녹으라고 그러나보다 좋다~" 이러면서.


감히 '살림 천재'를 꿈꿨던 나는 그 꿈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걸 느꼈다. 어떤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어리석은 중생아, 아직 멀었도다. 집안일이란 멀고도 험한 길이었음을 이제야 깨달았느냐?'




결국 세제를 샀다.
'세탁세제'라고 크게 쓰여져 있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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