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절과 희망으로 뒤섞인 선생의 짜장면

연극 '철가방 추적작전'의 봉순자 선생

by 별별
(이미지 출처: 두산아트센터)


연극 ‘철가방 추적 작전’을 보면서 나는 한동안 먹먹해졌다. 봉순자 선생 때문이다. 가출한 학생 정훈이가 일하고 있는 짜장면집을 찾아냈지만 그를 붙잡지 못하고 그저 짜장면 한 그릇 시켜서 묵묵히 먹던 선생. 누가 뭐래도 먹어보지 않아도 봉순자 선생이 먹는 짜장면은 퍽퍽하고 단무지는 쪼글쪼글할 게 틀림없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 내 앞에 한 아이의 모습이 천천히 그려졌다. 찰랑이는 스트레이트 펌 단발머리에 통통한 얼굴을 하고 있던 아이.





나는 수년 전 짧지만 선생 노릇을 했다. 가출 소녀들이 모여 있는 쉼터에서 봉사활동으로 과외수업을 한 것이다. 내가 맡은 친구는 중학교 3학년을 다 끝내지 못하고 가출한 아이였다. 그가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걸 도와주는 게 내가 맡은 일이었다.


애초부터 그는 공부에 뜻이 없었다. 수업시간에 자꾸만 잡담을 했고 나는 꾹 참고 어느 정도 이야기를 들어주곤 했다. 그가 문득문득 들려준 얘기들은 내가 상상하지도 못했던 어두운 세계였다. 철가방을 들고 다니면 되는 남자아이들과는 달리 여자 아이들은 다방을 드나드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는 어서 쉼터를 나가고 싶다고 했다. “그럼 이제 어디로 갈 건데? 집에 갈 거지?” 아이는 나를 빤히 바라봤다. “집도 학교도 안 가요. 쉼터도 구속하기만 하고 다 똑같아요.”


가출한 아이를 지켜보는 건 힘든 일이었다. 그에게 그 어느 곳도 보금자리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 내가 아무것도 도와줄 수 없다는 사실이 힘들었다. 왜 집에는 폭력적인 아빠가 있는 건지, 왜 학교에는 무관심한 선생님과 친구들이 건지, 왜 쉼터는 구속하는 것처럼 느낄 수밖에 없는 건지. 그저 봉사로 수업을 하는 게 내 일이었지만 그 아이를 둘러싼 모든 환경이 안타까웠다.


나는 검정고시라도 잘 봐서 나중에 기술을 배울 수 있는 고등학교를 가길 바랐지만 그 아이는 빨리 돈을 벌고 싶다고 했다. 검정고시를 치는 건 쉼터에서 지낼 수 있는 조건이었기 때문이었고 공부란 게 그의 인생에서 어떠한 동기부여도 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봉순자 선생과 동일시할 만큼, 가출 청소년들을 데려올 만큼, 아이들에 대한 사랑과 정의감이 투철한 사람이 아니다. 나는 고작 한 아이였지만, 봉순자 선생은 수많은 가출 청소년들을 봐 왔을 거다. 나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지만, 봉순자 선생은 그래도 아이들이 바르게 클 수 있는 건 학교라는 믿음이 있었을 거다. 대학 입학이라는 ㅡ우리 사회에서 그나마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ㅡ 장래를 아이들에게도 주고 싶었을 거다. 수없이 느꼈을 좌절에도 불구하고 그는 희망이 있기 때문에 버틸 수 있었을 거다.


감당하지 못할 만큼 커다란 좌절을 딛고 일어서려면 감히 상상하지 못할 만큼 그 희망이 대단하고 간절한 것이어야만 한다. 고작 내가 느꼈던 무력감이 짜장면의 완두콩 하나밖에 되지 않을 것인데, 봉순자 선생은, 가출한 학생을 찾아내고도 눈앞에서 바라만 볼 수 밖에 없었던 봉순자 선생은. 아마 그 짜장면은 정훈이를 학교로 다시 데려와도 학교가 그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체념과, 선생이지만 학생에게 해줄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는 좌절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훈이가 완전히 불량 청소년의 길을 걷지는 않을 것이라는 실낱같지만 그래도 단단한 희망으로 뒤범벅돼 있을 것이다.


(이미지 출처: 두산아트센터)


나의 선생 노릇은 그 아이가 다시 쉼터를 가출하면서 끝이 났다. 쉼터에 방문해서 아이가 이제 없다는 소식을 듣고 혼자 터덜터덜 발걸음을 돌려야만 했다. 육교를 지나서 주유소를 지나서 마트를 지나고 우리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돌아올 곳이 있는데 가출한 그 아이는 어디로, 집 밖으로 돌아간 걸까?


그때가 떠올랐다. 어느새 마지막 씬에서 짜장면을 먹고 있는 사람은 꼭 그때의 나인 것만 같았다. 아무것도 해줄 수 없지만 그저 오랜 세월 뒤에라도 가출한 그 아이를 기억하는 것만이라도 해주고 싶었다. 지금 어디에서든 잘 살고 있었으면 좋겠다고 바랄 뿐이다. 봉순자 선생도 가출한 학생을 생각하며 그렇게 바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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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철가방 추적 작전'을 보고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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