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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별 May 17. 2019

창경궁 돌담길은 지금 공사 중

내가 반했던 순간들

생각해보면 나는 내게 새로운 길을 알려줬던 사람들에게 항상 반했던 것 같다.




처음으로 창경궁 돌담길을 걸었다. 선배는 이 길을 따라 안국역에서 혜화역까지 걸어갈 수 있다고 했다.


"이 길을 처음 가 본다고? 이야~"


선배는 으스대며 허세 만땅이었다. 난 발그레 부끄러워졌다. 길을 몰랐다는 것도 그랬고 그냥 그때 그 순간이 부끄러웠다. 선배는 반쯤 먹은 생수 한 통을 들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물 좀 주세요'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날 왜 함께 걷게 됐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별로 말 붙일 기회도 없고 굳이 말 붙일 이유도 없던 선배였다. 같은 학회였지만 학번은 좀 차이가 났다. 아마 도서관에서 나오다 우연히 집에 같이 가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집에 가다 말고 우연히 산책길로 빠지게 되었을 것이다. 조금은 공기가 습하고 살랑 와닿는 바람이 상쾌하게 느껴질 때, 가끔 그렇게 산책을 부르는 밤이 있다.


우리는 처음으로 둘이 걸었다. 저만치 떨어져 조금은 어색했겠지. 자전거가 곁을 쌩하고 지나가고 어두운 굴다리를 지나갔다. 시야가 확 캄캄해 졌을 때 나는 옆에 누군가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던 것 같다.


선배는 말이 많은 사람이라 나는 잠자코 얘기를 듣고만 있을 수 있었다. 예전엔 저랬고 요즘은 이렇고 뭐 어쩌구저쩌구... 가끔 진지하게 듣는 척 하면서 온통 나만의 기분에 휩싸이고 있었다. 알 수 없는 들뜬 기분에 붕 뜬 느다.


선배는 발걸음이 빨랐던 것 같다. 나도 발걸음이 빠른 사람이라 우리는 굉장히 무슨 운동이라도 하는 것처럼 걸었다. 발걸음의 속도가 관성이 붙으면서 앞을 휘젓고 공기를 가르는 느낌이 들었다. 함께 공기를 헤엄쳐 나가는 조정경기 선수가 된 것 같기도 했다.


그날 밤 창경궁은 문이 굳게 닫혀있다. 난 다음에 여기도 와 봤으면 좋겠단 생각을 했다. 언젠가 누군가와 함께, 뭐 굳이 말하자면 선배랑 함께. 그때는 감히 선배를 좋아한다는 생각조차 못했을 때지만 나중에 그 선배를 좋아하게 되었을 때, 아마 그 시작은 그날 산책을 하던 밤이었던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가 초여름 무더운 밤이었다.






창경궁 돌담길엔 어떤 새로운 길이 들어설까. 본래 이어져있던 정원을 연결하려는 것일 테다. 그 길을 걸어갈 때마다 문 하나가 덩그러니 도로 위에 남아있던 모습을 보면 안타까웠다. 도로로 끊긴 창경궁을 복원하는 것은 잘 된 일이다.


하지만 솔직한 심정으로 그곳이 공사를 해서 시원섭섭하다. 아주 사소한 이유로, 내가 이전에 난 길을 걸었다는 이유만으로 말이다. 난 언제나 창경궁을 걸어갈 때마다 그 선배를 추억했다.



며칠 전 유난히 후텁지근했던 날,  <공사 중, 보행자 전용도로>를 걸으며 매연에 숨이 턱턱 막혀왔다. 나는 또다시 홀로 길을 걷고 있었다. 함께 걸었던 기억은 혼자 걷는 것으로는 기억이 덧입혀지지 않는다. 기억도 공사를 했으면 좋으련만, 노을은 기억을 되살리기만 할 뿐이다. 유난히 붉은 노을이 지던 날이었다.


돌담길엔 사람들의 발자국이 쌓인다. 나의 추억, 그들의 추억, 모두 쌓인다. 플라타너스가 자라나던 오월의 어느 날, 낙엽 대신 겹겹이 쌓인 추억을 자박자박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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