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물음에 그는 단호했다. 사랑이란, 그가 말하길, 만질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가 묘사하는 진정한 사랑은 '합일', '완벽한 하나 됨'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육체적 사랑을 당연히 포함하는 것이다.
나는 즉각 그게 아니라고 반박하고 싶은 유혹이 들었다. 그에게 좀 더 내가 말하는 사랑을 이해시키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경험이 많은 사람이었다. 내가 모르는 무언가, 결국은 수긍할 수밖에 없는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사랑은 육체 없이도 나눌 수 있어야 한다는 나의 믿음을 버릴 순 없었다. 고집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사랑이란, 거리를 극복하고 육체를 극복한 사랑이었다.
며칠 뒤 그는 나에게 '현의 노래' 책을 빌려줬다. (그의 책은 언제나 낡아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새 책처럼 나에겐 그 낡음까지도 소중했다.) 그 안에는 몇 차례 꽤나 농밀한 묘사가 나왔다. 늦은 밤 침대 위에서 그걸 읽으면서 자연스레 상상에 빠져들었다.
두 육체가 하나 되는, 물이 흐르고 뜨거운 열기가 뿜어져 나오는, 어떤 에로틱한 상상이었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자연스레 교감했다. 내 상상 속 벌거벗은 몸들은 아주 깨끗했고 음악에 춤추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아직까지 벌거벗은 몸이 그와 나라는 걸 상상하긴 힘들었다.
우리는 같이 밤을 지새운 적 있었다. 내가 그에 대해 했던 착각은, 그가 섹스를 원한다고 생각했던 거였다. 그는 사랑을 묘사할 때 육체적인 사랑을 자주 묘사했다. 그의 언어는 자꾸만 나의 상상을 자극했다. 그리고 그는 직접적으로 '섹스'라는 단어를 언급하기도 했다. 그는 내가 성에 보수적인 사람이란 걸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를 떠보는 건가 싶었다. 앞서 나간 상상으로 좀 놀라긴 했지만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겁먹은 걸 들키지 않고 싶었다. 하지만 마음의 준비를 해야만 했다.
그가 원하는 사랑이란 만질 수 있는 것이어야 했다. 나는 그와 사랑을 하고 싶었고 그가 원하는 사랑을 주고 싶었다. 그가 자기 집으로 나를 초대했을 때, 상상과 상상을 꼬리 물며 어쩌면 우리가 함께 잘 지도 모른다는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상상을 했다.
하지만 우리는 '아무 일없이' 밤을 보냈다. 수많은 대화를 나누고 몇 병이나 술을 마시고 앨범을 몇 개나 갈아치우며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함께 자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나에겐 아무 일 없었던 것이 됐다. 약간 실망스러웠다. 내가 그를 온전히 착각했다는 것, 그리고 오히려 내가 그를 원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됐기 때문이다.
그는 별 생각이 없었다. 아니, 사실 나보다 더 생각이 많은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섹스를 했더라면, 사귈 수 있었을까요?"
그는 마지막으로 만나던 날 이렇게 물어봤다.
"아니요."
이보다 더 단호할 수 없었다.
그의 물음은 두고두고 곱씹을 만한 것이었다. 내가 궁금한 지점은 둘의 상관관계다. 그는 왜 섹스와 연애를 결부시킨 걸까. 그렇다면 나는 왜 이 질문에 그토록 단호하게 아니라고 한 걸까?
그는 나와 전혀 섹스를 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사귀는 사람들끼리 할 수 있는 사랑의 행위가 섹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나는 그와 섹스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사귄다는 전제 없이도 말이다. 내가 아니라 그야말로 진정 보수적인 사람이었다.
- 연애는 부담스럽다. 나의 생각이다.
- 나와 연애는 부담스럽다. 그의 생각이다.
결국 우리는 연애를 할 수 없었다. 연애가 불가능했던 건 그 때문이다. 섹스는 도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혹시 내가 아무렇게나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친구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사귀지 않고도 관계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해? 그녀는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은 없지만 남자 친구와의 관계에서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의 남자 친구는 성관계를 갖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듯하고, 그녀는 그것이 '사랑'을 하는 데에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덧붙여서 그 중요성이란 대화를 나누는 데에 있어서 비중을 차지하느냐, 관계를 갖지 않아도 충분히 만족감을 느끼느냐에 대해서 판단할 수 있다고 했다.
내가 생각했던 지점이 바로 이것이었다. 사랑, 혹은 사귀는 것에 대해 섹스가 차지하는 중요성은 별로 크지 않았다. 사랑한다면 섹스할 수 있으나, 사랑하지 않아도 섹스를 할 수 있다. 정확히 말해 사랑은 섹스의 충분조건이지 필요조건이 아니었던 것이다.
- 사랑하면 섹스를 한다. 참인 명제.
- 섹스를 하면 사랑한다. 거짓인 명제.
내가 섹스를 하면 사랑(연애)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말한 건 바로 이 때문이다.
감히 생각해왔다.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사람들 간에 육체적 관계는 있든 없든 상관없다고. (또 심지어 사랑한다면 사랑 없는 다른 이와의 육체적 관계도 용인할 수 있다고.) 섹스와 사랑의 상관관계는 나에게 간단한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의심스럽다. 내 믿음이 너무 확고하기 때문에 의심스럽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내 믿음은 진실이 아닐지도 모른다. 진실은 누가 옳고 그르냐를 따지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우리 삶은 참된 진실만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때론 거짓을 진실이라 믿는 것도 진실이 될 수 있다. 때론 참을 거짓이라 믿는 것은 거짓이 되기도 한다.
어쩌면, 어쩌면 그의 질문이 다른 물음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그의 질문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그가 너무 빙 둘러말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가 어쩌면 묻고 싶었던 것, 또는 내가 그에게 묻고 싶었던 것. 그에게 묻지 못한 단 하나의 질문. 그에게 물어볼 수만 있다면 정말이지 묻고 싶은 것.
'우리가 사랑을 했더라면, 어땠을까요?'
아무 조건도 없는 사랑, 그냥 사랑을 했더라면. 지금껏 우리가 했던 모든 가정이 다 부질없도록 만드는 그런 사랑을 꿈꿀 수 있다면.과연 그것은 가능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