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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별 Mar 28. 2019

“당신과 연애하고 싶어요”같이 뻔한 대답 말고

내가 정말로 당신과 하고 싶었던 것

그는 나에게 물었다.      

“벼리씨는, 나랑 뭘 하고 싶어요?”     


기습적인 질문이었다. ‘뭘’이란 단어에 강세를 두고 약간 짜증이 섞인 말로 물었던 것 같다. ‘뭔가 자꾸 더 바라는 것 같은데, 도대체 뭘 더 원하는가, 이 앞에 앉은 여자란 사람은.’ 아마도 그 말을 한마디로 압축한 말 같았다.      

나는 질문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었다. 그는 정말 내가 바라는 걸 말하길 바라는 건가? 내가 바라는 걸 말하면, 그걸 들어주기라도 한단 말인가? 아니면 더 이상 나에게 아무 것도 바라지 말라는 말일까?


그 상황에서 나올 수 있는 뻔한 대답은 아마도, ‘저는 당신과 연애하고 싶어요’였을 것이다.      


내가 그를 좋아하는 건 이미 공인된 사실이었다. 나는 그에게 고백했고 ‘나는 그를 좋아하는 사람’, ‘그는 나를 잘 모르는 사람’인 상태로 우리는 몇 번쯤 만났다. 만나서 함께 밥도 먹고 술도 마시고 떡볶이도 먹고, 적어도 나 혼자서는 그걸 데이트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 정도 만나면 약간의 관계를 정리할 필요가 생긴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만남의 지속에 대한 확신은 없었다. 다만 그 상태로 그대로 있어도 좋을 거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나는 그저 그와 함께하는 순간이 즐거웠다. 그것이, 그에겐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을까. 아니면, 어쩌면 그는 나를 질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사람이 느끼는 감정을 그도 갖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은 ‘나도 좀 알자, 그 느낌.’, 아마도 그러한 뜻의 짜증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그의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가 원하는 대답을 하고 싶지 않았고, 어떻게 하면 가장 솔직하게 말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그와 하고 싶은 건... 물론 한 가지로 말하기란 어려울 정도로 많은 것들이 있었다. 좋아하는 사람과 모든 걸 다 나누고 싶으니까. 평소에 그와 함께하고 싶다고 생각한 것들은, 편지 주고받기, 기차타고 정동진 가기, 달콤한 케이크 나눠먹기, 큰 소리로 음악 틀어놓고 춤추기, 취할 때까지 술 마시기, 함께 담배피기 등... 하지만 그 순간 맨 처음 떠오른 건, ‘만져보기’였다.        


뭔가, 나는 가로막혀 있었다. 그에게 내가 이성으로 다가간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는 나를 여자로 보고 있는 걸까? 그와 약속을 앞두고 거울을 보면서 나는 항상 이런 고민을 했던 것 같다. 그 어느 때보다도 정성껏 머리를 말리면서, 평소엔 바르지도 않던 아이섀도우를 한껏 덧칠하면서, ‘과연 그가 날 이성적으로 바라볼까?’라는 고민이 떠나지 않았다.      


그는 신기루같은 존재였다. 어쩌면 내 앞에 있는 게 사람이 아니라 내가 꾸며낸 환상같은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한번 베어물면 곧 입 안에서 녹아 없어져 버리고마는, 그는 솜사탕같은 존재였다. 언제나 그와의 만남은 너무 빨리 시간이 흘러가버렸고 그와 헤어지고 집에 돌아오면 내 손에는 아무 것도 잡힌 것 없이 어떤 추억도 쌓인 것 없이 다시 무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다음날 메시지를 보내면 그와의 관계는 완전히 새로 시작되고 말았다.      


나는 진짜 그를 만지고 싶었던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정말 존재한다는 걸 느껴보고 싶었던 것 같다. 만지고, 쓰다듬고, 톡톡 두드리고, 눌러보고, 깨물어보고, 꼬집어보고, 그렇게 그의 피부를 살갗으로 느끼고 싶었다. 그와 하고 싶은 걸 물었을 때 ‘안고 싶어요. 키스하고 싶어요’라고 제일 먼저 말하고 싶었다.     


“저는... 대화하고 싶어요.”      


내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그거였다. 나도 놀랄 정도로 내가 생각했던 말이 아니었다. 말하고나서도 흠칫 놀랐는데, 하지만 한번 더 힘주어 말했다.


“저는 대화를 하고 싶어요.”     


무엇이 진짜 본심이었는지 모른다. 지금도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그에게 스킨십을 바라는 건 일방적으로 바라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가 나에게 감정이 없다면 지금으로선 그 스킨십은 ‘함께’하는 건 아닐 테다. 나는 감히 그걸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랬는지 모른다.     


그와 대화를 하고 싶은 건 정말이었다. 나는 진심으로 대화를 하고 싶었고, 그건 내가 진심으로 외로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도 정말이지 외로울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나와 비슷한 사람들을 잘 알아본다고 생각했다. 그는 내가 간파했을 때 나처럼 외롭고 어두운 사람이었다.      


그를 알고 싶었고 그와 치열하게 토론하고 싶었고 그의 말에 말문이 막히고 그의 말에 봇물처럼 내 말이 쏟아져 나오고. 나는 우리가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이기를, 한 편의 영화같고 그림같기를 바랐다. 우리는 대화로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존재이기를 바랐다. 나에게 ‘대화하고 싶다’란 우리가 함께할 수 있는 가장 최상의 상태, 가장 궁극적인 상태를 이루고 싶다 의미였다.      


“그래요, 대화. 우리 대화합시다.”      


그의 대답은 또 나에게 알 수 없는 궁금증을 안겨줬다. 나는 그때 물었어야만 했다. 당신이 내게 바라는 건 뭐냐고. 나는 바보같이 그걸 묻지 못했고, 아직까지도 그가 뭘 원했는지 그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상태로 그냥 앉아 있다.     


그때 그는... 약간 안심한 듯 보였다고나 해야 할까? 내가 대화하고 싶다는 말에, 그는 웃었다. 약간 바보같이 웃었다. 내 말을 비웃는 건 아니었지만 내가 말한 ‘대화’를 쉽게 생각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욕심이 없군요. 고작 대화라니.' 이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닌데, 그 대화라는 게 나에겐 얼마나 큰 의미인지 당신은 모르나봐. 나에게 대화란, 무지무지 많은 걸 바라고 또 바라는 건데. 당신의 모든 시간, 내가 모르는 당신의 역사, 당신의 모든 느낌을 알고 싶은 건데. 그리고 나도 내 모든 걸 온 힘을 다해 알려주고 싶다는 뜻인데. 어쩌면 섹스보다 더한 합일을 말하는 건데. 당신은 지금 뭘 상상하고 있는 거야. 저기요, 당신은 내 말을 제대로 알아 들은 거예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웃는 거죠??     


나는 이렇게 쏘아붙였어야 했다. 하지만 물론 그러지 못했고.




그의 모든 질문이 그랬듯이, 그 질문 또한 내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나는 과연 그와 뭘 하고 싶었던 걸까. 내가 생각했던 말, 내가 꺼냈던 말, 그리고 심지어 내 일기장에 적어놨던 말은 모두 제각기 다르다. 그런 걸 보면 어쩌면, 나는 그와 뭘 하고 싶었는지 스스로 알 수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그걸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내가 무턱대고 그에게 돌진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몸을 사렸고 매사에 조심스러웠고 나는 그가 그러면 그럴수록 더 날뛰는 나방같은 몸짓으로 그에게 구애하는 사람이었다. 빛만 보고 돌진하는 나방은 그가 달려드는 게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다만 달려들 뿐이다.


다시 궁금증으로 빠져든다. 그에게 뿐만 아니라 누군가에게 사랑을 원할 때 나는 과연 무엇을 바라는 것이냐고.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 걸까. 대화를 하고 싶은 걸까, 스킨십을 하고 싶은 걸까, 아니면 그놈의 연애를 하고 싶은 걸까. 잘 모르겠다.


어쩌면 그는 내가 "잘 모르겠어요"고 말했더라면, 비로소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를  잘 알고 있었던  분명하다. 설령 이 모든 게 내가 착각한 것이더라도 그가 나를 이해하기 위해 잠시동안이나마 노력한 것이 무척 대단한 것처럼 느껴진. 그런 생각에 이르자 그가 또다시 미워진다. 진심으로 원망스럽고, 또 그리워진다




과연 이 얘기를 해야할까? 나는 고민했다. 하지만 아직도 쓰지 못한 많은 얘기들이 있다. 나에게 그와 있었던 일을 얘기하는 게 어떤 의미일까. 오늘도 나는 정작 써야 하는 글은 따로 있는데 왜 이따위 글이나 쓰고 앉았는가. 혼자 자괴감에 빠졌다. 하지만 오늘은, 문득 이 '대화를 하고 싶다'는 게 나에게 얼마나 소중한 의미였는지 깨닫고 말았다. 그것도 책을 읽던 도중에, 우리의 대화 한 장면이 갑자기 스쳐 지나가면서, 나는 예고없이 나를 미치게 하는 눈물 따위를 흘리고 말았다. 망할, 그래서 써야만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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