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을 시작하며, 작가는 한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어렸을 적 살던 종암동, 동네에서 가장 높은 아파트에서 바라본 언덕배기 동네 풍경이었다. 어릴 적 아파트에 살던 경험은 그의 인생 전반에 걸쳐 무의식적으로 동기 부여를 하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고백한다.
(이미지 출처: 두산아트센터)
그는 본래 한국화를 전공했다. 추상적인 학풍 속에서 자신은 어떤 작품을 만들 것인가에 대한 심심찮은 고민을 하던 중에 남산을 오르게 된다. 그곳에서 본 반짝이는 도시의 야경에 무한한 영감을 얻고 어렴풋이 자신의 길을 예감하게 되었다. 이후로 청계천 풍경 등을 그리며 도시의 옛 모습을 화폭에 옮기는 일에 몰두하기도 했다.
그가 아파트를 ‘발견’ 한 것은 2004년이었다. 청운동을 지나가는 길에 갑자기 청운 시민아파트가 창문에 구멍이 뚫린 채 흉측한 몰골로 우두커니 서 있는 모습을 발견하였다고 한다. 작가는 몰래 그곳에 잠입했고 철거를 앞두고 도망치듯 떠나가 버린 수많은 가구들의 흔적을 생생히 목격할 수 있었다. 아파트 7개 동 중 2개가 철거되었고 나머지도 곧 헐릴 예정이었다. 황폐한 모습에 압도당한 작가는 이곳을 배경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는 찢긴 달력과 남겨진 음식에서 나온 파리 떼를 모티브로 한 그림, 그대로 두고 간 목마 장난감 등을 소재로 한 그림 등을 그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파트를 정면에서 바라본 거대한 전경을 완성하게 된다. 이는 아파트를 소재로 한 그의 첫 번째 작품이었다.
(이미지 출처: 두산아트센터)
아파트 바라보기
청운 시민아파트를 주제로 한 첫 번째 전시회를 마치고 그의 관심은 남아있는 다른 아파트들로 이어졌다. 작가는 강연에서 직접 찾아다녔던 아파트들을 하나하나 소개했다. 그가 6-70년대 오래된 아파트를 바라보는 관점은 다른 이들과 달랐다. ‘중산 시범아파트’는 아파트의 조형이 몬드리안 작품을 연상케 하고 마치 건담과 같이 우뚝 선 모습이 인상 깊었다고 한다. ‘금화 시민아파트’를 올라서는 옥상 위에서 상추를 키우고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시가지 풍경이 너무나 아름답다고 말했다. ‘대성 맨숀아파트’는 그 돌출된 부분이 너무 아름다워 작품으로 옮길 때는 직접 부조와 같이 재료를 덧붙여 입체감을 살리려 노력했다고 한다. 과연 예술을 하는 분답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부 주도의 시민아파트의 역사가 종말하고 민간 자본 주도로 지어진 아파트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보문역에 있는 ‘대광 맨션아파트’는 아파트 주민들이 함께 벽돌을 날라지었다고 하는 아파트이다. 옛날에는 육각형 모양으로 아파트가 둘러싼 중앙에 주차장 대신 밭과 놀이터가 있었다고 한다. ‘수색 아파트’는 지금은 퇴락하여 일 년 전 철거된 아파트이다. 하지만 건설할 당시 옛날 지역 유지가 지역개발을 목적으로 지은 수세식 고급 아파트였다고 한다. ‘남아현 아파트’는 중정에 빛이 가득하고 곳곳에 공간을 활용하여 작은 정원을 꾸민 것이 인상 깊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는 리모델링을 하여 옛날 그 아기자기한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다며 아쉬워했다.
오래된 아파트의 가치
정재호 작가는 오래된 아파트라고 해서 무조건 철거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인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아파트를 찾아다니며 그냥 바라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직접 아파트의 역사 속에 들어가 보고자 노력했다. 경비원 아저씨는 물론이고 그곳에 살고 있는 주민들을 여럿 인터뷰했다. “너무 튼튼하게 지어져서 못 하나 들어가지 않고, 옛날에는 고급 아파트였고 이 집에서 고기를 구우면 다 함께 나눠 먹고...”와 같은 레퍼토리가 있다고 한다. 이런 얘기들을 들으면 옛날 아파트는 마치 부락 공동체, 또는 우리네 방식의 유토피아 같은 느낌도 든다.
이처럼 옛날 아파트는 역사적으로 가치가 있는 것은 물론이고 공동체적인 삶의 터전을 일구려 한 흔적이 남아있으며 아직도 주거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는 곳도 많다. 그리고 오래된 아파트에서 발견할 수 있는 미학적 가치를 무시할 수 없다. 무엇보다 작가님은 아파트를 작품으로 옮기고 예술적 가치를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누구보다도 노력한 분이다.
(이미지 출처: 두산아트센터)
작가가 꼽은 가장 아름다운 아파트, 홍제역 ‘안산 맨션’을 예로 들자면 이곳은 참으로 ‘단아하다’. 과연 작가가 찍은 사진들을 보면 그가 말한 단정하고 단아한 구석구석을 엿볼 수 있었다. 획일화된 공간 설계가 아니고 다양한 변화를 주고자 노력했으며 이쪽에서 바라볼 때, 아래에서 바라볼 때, 위에서 내려다볼 때 각기 다른 풍경을 연출해내고 있었다. 하다못해 난간을 위해 조금 덧댄 구조물이 아름답지 않냐 시며 청중들에게 되묻는 모습을 보면서 그의 순수한 열망을 엿볼 수 있었다. 그는 현존하는 옛날 아파트들을 직접 가서 그 풍광과 분위기를 직접 느껴보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직접 가서 본다면 작가님과 같이 그런 눈으로 아파트를 바라볼 수 있을까 의심스러웠지만 한편으론 눈을 씻고 다시 아파트를 바라보고 싶었다.
예술가에게 아파트란
물론 이렇게 아파트를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는 것은 그가 순수 예술을 하는 작가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중에 Q&A 시간에서 아파트를 대상화하는 것에 대한 불편한 감정은 없는가라는 질문이 나왔다. 작가님은 직접 철거민을 맞닥뜨린 적도 있었다. 현실을 소재로 한 예술가로서 단지 아파트를 이용하고 떠나버리는 것이 아닌가 고민을 하신 적도 있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현실을 책임지는 것은 예술을 넘어선 영역이다. 정재호 작가는 아파트란 대상을 택한 것은 어떻게 말하면 ‘운명’이었고 그것을 선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업보처럼 짊어지고 가야 하는 예술가의 소명을 스스로 받아들이고 이해할 때, 현실을 변화시키지 못했다는 지나친 죄책감을 벗어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의 수많은 아름다운 아파트 연작을 감상하고 그의 열의에 찬 강연을 들으면서 내 안에서 아파트가 좀 더 밝고 아름다운 이미지로 변화되는 것을 느꼈다.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때, 작가로서 그의 역할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이미지 출처: 두산아트센터)
우리에게 아파트란
요즘에는 ‘뉴트로’라고 하여 20세기의 문화적 가치를 복원하고, 달동네, 뒷골목 등 현존하는 오래된 공간을 재발견하는 것이 새로운 풍토가 되고 있다. 비록 아파트는 실제 사람들이 사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단순히 아름답다고만 말하긴 어려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날 대한민국은 아파트 공화국이기에, 작가가 말한 미학적 가치를 계승하는 것은 우리 주변을 좀 더 아름답게 변화시킬 수 있도록 하는 인식의 전환이 될 수 있다.
(이미지 출처: 두산아트센터)
이날 강연은 작가의 시선으로 다시 한번 아파트를 감상한 시간이 되었다. 그의 눈으로 바라보자 아파트는 그저 낡은 건축물, 평당 얼마인 부동산이 아닌 우리의 이야기가 담긴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의 종암동 추억에서 말해주듯 아파트는 우리 대부분의 기억을 담고 있는 과거이자 지금 살아가고 있는 현재다. 아파트 속에서 발견한 공동체적인 삶과 낡은 것을 보존하는 것은 우리의 역사를 보존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아파트를 기억하고 아파트에서 살아간다. 예술가의 눈으로 아파트를 바라보면서, 우리 삶을 좀 더 아름답게 좀 더 소중히 할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한 것 같았다.
- 다음 강연 - 6월 24일 월요일 (15:00) 임형남, 노은주 건축가의 <아파트는 골목이다> 6월 24일 월요일 (19:30) 강재호 교수의 <아파트는 미래다>
- 현재 공연 - 6월 8일까지 연극 <녹천에는 똥이 많다> 6월 22일까지 전시 <OUR PARADISE, 아마도 멋진 곳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