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얼굴들' 책을 읽고
처음 마산에 이사 오던 날, 나는 차 안에서 펑펑 울던 것을 기억한다. 내가 살던 창원은 계획도시여서 유달리 깨끗하고 훤칠한 도시 풍광이었는데, 그와 달리 마산은 오래된 도시의 날것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었다. 어린 마음에 낡은 주택가와 노천 시장 풍경을 보고 낯설고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근 십 년을 서울에서 지내고 잠깐 몇 년 외국에서 머물다가, 참으로 오랜 만에 마산을 찾았다. 오랫 동안 떠나있다 보니 다시 찾은 마산이 무척 달리 보였다.
북마산 시장 철길은 어느새 산책로로 바뀌어 있었고 희미하게 흔적이 남아 있을 뿐이다. 간간이 보이는 철길을 따라 죽 걸어가 보았다. 마침내 해안도로가 나오고 철로는 지금의 찻길 중앙에서 속절없이 끊겼다. 내심 궁금해졌다. 철로는 어딜 향하고 있었던 걸까, 옛날 마산은 어떤 곳이었을까. 우연히 도서관을 들러 창원의 책 서가에서 이 책을 발견했을 땐 마산의 정취에 푹 빠져있을 때였다.
책을 살펴볼 때 목차를 훑는 버릇이 있다. 『도시의 얼굴들』책도 마찬가지다. 이 책은 마산에 머무른 16명의 인물들을 이야기 한 책이라는데 그 중 눈에 띈 것은 내가 좋아하는 시인 백석이었다. ‘아니 평안도가 고향이라던 백석이 마산에 왔단 말인가?’궁금증을 참을 수 없어 그의 이야기부터 펼쳐보기 시작했다.
마산에 낭만을 남기고 간 문인들
백석은 란이라 이름 붙인 여인을 사모하여 마산에 내려왔다고 한다. 여인의 고향은 통영이었고 당시 통영은 마산을 경유해 가야 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책에서는 구마산역(지금의 육호광장)에서 구마산 선창(지금의 마산농협 남성동지점)으로 걸어가는 백석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다. 기가 막힌 우연으로 란은 그때 선창에서 내려 거꾸로 구마산역으로 걸어가던 중이었다. 둘이 스치고 지나간 것을 란은 알았고 백석은 몰랐다고 한다. 결국 백석은 란과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했다. 하지만 그때 둘이 눈이 마주쳤더라면, 번화했던 마산 거리에 사람들이 조금만 적게 다니고 바삐 걷던 사람들의 발걸음이 조금만 느렸더라면, 부질없는 상상이지만 만약에 그랬더라면. 나는 백여 년 전을 상상하며 그때 그 불종거리를 걸었다. 그리고 이루어지지 못한 짝사랑을 연모했다. 둘은 비록 만날 수 없었지만 백석의 그리움이 맺힌 길은 오늘날 나의 그리움을 더해 그대로 남아있다.
그 외에도 마산을 거쳐 간 문인들이 많았다. 천상병, 김춘수, 나도향, 이원수 같은 분들이다. 천상병은 마산공립보통학교와 마산공립중학교를 졸업했다. 1901년 마산에 처음으로 생긴 마산공립보통학교가 현재 성호초등학교로, 1936년 마산공립중학교가 현재는 마산중·고등학교로 나뉘어 존재하고 있다. 알고 보니 모두 아버지의 모교들이다. 항상 아버지께서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던 학교가 이토록 오랜 역사를 간직한 곳이었다니 무척 반갑고 내가 다 뿌듯해져 버렸다.
김춘수는 마산고등학교의 교사로 근무하던 중 천상병의 시재를 알아보고 자신의 시집을 손수 선물해주고 그에게 시 쓰기를 독려했다고 한다. 그 시집 선물은 천상병을 평생 시인으로 살게 했다고 한다. 그렇게 한 시인은 또 다른 시인을 탄생시켰던 것이다. 그 시절 김천수가 쓰고 발표한 시가 바로 그 유명한 「꽃」이었다고 하니 누군가는 누군가에게 꽃이 된 셈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 또한 아버지의 옛 모교가, 마산을 매개로 한 두 시인이 '꽃'으로 다가온 애틋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마산에서 요양하고 떠나간 이들
마산은 물 좋고 공기 좋아 예로부터 결핵을 앓는 사람들이 요양을 오는 곳으로 유명했다. 안타깝지만 요양 차 내려온 이가 「벙어리 삼룡」으로 유명한 나도향이다. 의대를 마다하고 문인의 길을 걷다가 도리어 환자가 되어 마산을 찾았다. 그는 마산을 노래한「가고파」를 지은 친구 이은상의 집에 기거했다. 지금은 마산이 온통 매립지로 둘러싸여 해안가를 찾아볼 수 없지만 옛날에는 월포, 가포 해변이 맑은 물과 흰 모래로 풍광이 이름난 곳이었다고 한다. 젊은 나도향은 이은상과 함께 월포해수욕장을 갔다가 한 여인이 실수로 그를 발로 차는 바람에 영옥이라는 여인을 알게 된다. 그 뒤로도 여인과 만남을 이어가다가 피를 무참히 쏟는 날들에 죽음을 직감하고는 마산을 떠나고 만다. 그의 가슴 아픈 투병과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 이야기는 지금은 사라져 버린 옛날의 순수했던 해변과 닮았다. 돌이킬 수 없어 더욱 더 아름다웠던 그 시절 해안가 풍경을, 나는 멀리서 다리 위에서 떠올려 보는 수밖에 없었다.
마산에서 일제시대 파란을 겪은 독립운동가들
이 책은 일제 침략기 1900년대부터 해방 직후 1960년까지 역사적 인물들을 다루고 있었다. 마산이 일제에 의해 기차역과 항구로 본격적으로 수탈의 통로로 이용되기 시작할 무렵부터다. 내가 철길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궁금해 했던 그 끊어진 철로는 원치 않게 바다로, 일본으로 향했다.
그 시절 일제 강점기 마산을 거쳐 간 많은 독립지사들이 있었다. 책에 나온 바로는 이극로, 김명시, 임화와 지하련, 명도석, 옥기환 같은 분들이었다.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인물을 꼽아보라 한다면 바로 김명시다. 그는 여성에 불과한 누군가의 딸, 누이, 부인이라는 당시 성역할의 한계를 뛰어넘어 당당히 학업을 성취하고 독자적인 독립 운동의 길을 걸었다. 만주 벌판 대륙을 휘달려 백마 탄 여장군이라 불리며 일제와의 전쟁을 선두 지휘하던 김명시. 역사학자 강만기 선생은 마산이 배출한 독립운동가로 그를 제일로 꼽았다. 하지만 나에겐 김명시 이름 석 자가 이토록 낯설다니, 죄송스러운 마음이 컸다.
그는 어린 시절 마산공립보통학교(지금의 성호초등학교)를 다녔다. 이 책은 어린 김명시가 책 보퉁이를 끼고 종종걸음으로 등굣길을 걸었던 것을 상상한다. 저자에게 탄복한 것은 이 부분에서였다. 나는 책의 도움으로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생생하게 길을 찾아 어린 명시와 함께 걸을 수 있었다. 지금은 터를 알 수 없는 오동동 본가에서 출발하여 그 당시 건설 중이던 남성동 파출소 앞 신작로를 건너고, 어린 아이가 즐겨 다녔을 법한 창동 골목길을 걸어가 지금도 그대로 있는 평안안과 앞에 있었다던 철도 건널목 앞에 멈춘다. 그리고 농협 주차장 뒷골목으로 가서 학교 정문이 보이는 추산동 길을 따라 올라갔던 것이다. 나에게 익숙했던 이 길은 이젠 어린 김명시의 환영과 함께 그가 항일 운동을 하던 시절 저 멀리 만주 벌판까지 떠올릴 수 있는 곳이 되었다. 장소는 변하지 않는 것 같지만 끊임없이 변함으로써 시간을 되살린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또 다른 독립운동가 명도석과 옥기환은 마산에서 나고 자란 분들이다. 명도석은 3·1만세운동, 신간회 마산지회, 조선어사전편찬회, 조선건국동맹의 주역이었으며, 마치 한 편의 역사 교과서나 다름없는 그의 생애는 무척 감동적이었다. 해방 후 20여 일 동안 건국준비위원회 마산위원장으로 뽑혀 그때가 가장 행복한 출근길이었을 것이라는 저자의 말을 듣고 그가 불종거리를 가벼운 발걸음으로 걷는 풍경을 떠올리며 나까지 미소가 피어올랐다.
옥기환은 만석꾼이라는 칭호답게 매우 부자였지만 일제에 타협하지 않았던 분이다. 수완 좋게 많은 돈을 벌어 그 돈을 슬기롭게 임시정부 독립 자금으로 빼돌렸다. 돈이 없어 배우지 못하는 아이들의 교육 사업에 투신하였고 30여 년 간 지속적으로 마산노동야학을 설립하고 운영해 나갔다. 식민지 독립운동, 해방과 3·15에 이르기까지 마산노동야학출신들이 지역사회에 끼친 영향은 매우 컸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각종 고등교육 학교를 설립하고 회갑을 기념해 극빈학생 구제비로 거금을 기부하는 등 마산의 교육에 큰 족적을 남겼다.
마침 2019년은 3·1만세운동 100주년을 맞이해 유난히 일제 강점기를 떠올릴 수 있었던 해였다. 먹고 살기 힘들면 힘든 대로, 돈이 많으면 많은 대로 독립운동을 하기 힘들었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에 항거하고 나라의 미래를 꿈꾼 분들은 모두 참 훌륭하고 대단한 분들이었다. 지역에서 활동한 탓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분들도 많을 테지만 알지 못한 모든 분들에게도 존경을 표한다. 창신학교, 마산형무소와 같이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그분들이 거쳐 간 장소를 애써 찾아내고 기억하며 존경의 마음을 오래오래 간직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된다.
마산에서 현대사에 방점을 찍은 이들
끝으로 이 책은 마산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인 3·15 운동과 김주열을 이야기한다. 미처 알지 못했던 사실은 김주열이 마산의 재학생이 아니라 남원에서 마산상업고등학교(지금의 용마고등학교)로 입학시험을 치러 멀리서 온 학생이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원래 3월 14일에 합격 발표가 날 예정이었는데 뒤숭숭한 시내 분위기로 16일로 연기됐고 때문에 15일 마산 시내를 뒤덮은 시위운동에 참가하게 된 김주열은 그만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고 한다. 나는 역사의 파도에 휩쓸린 한 청년의 안타까운 죽음 앞에 탄식을 터뜨리고 말았다.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 그의 시신이 떠올랐고 제보를 받은 기자가 김주열의 눈에 최루탄이 박힌 사진을 보도함에 따라 다시금 이승만 정권을 규탄하는 시위운동이 재점화 되었으니, 그 결과 4·19 혁명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한 청년의 피는 마산 바다를 물들였고 거대한 역사의 물결은 전국을 휩쓸어버렸다. 사실, 좀 더 솔직히 말해서 315 만세운동을 주도한 수많은 학생들, 열사들에게 좀 더 역사가 집중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지만, 하지만 김주열 학생의 죽음으로 민주화운동의 도화선이 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가슴아프게도 나는 김주열 열사와 그 당시 시위운동으로 쓰러지고 일어섰던 모든 이들을 추모하고자 한다. 모두 자랑스러운 역사의 장소를 물려준 이들이었다.
이곳, 마산을 거쳐간 사람들
책을 읽으며 도시를 탐험하며 이곳을 거쳐 간 16명의 얼굴들을 떠올렸다. 이 책의 특징은 앞서 말했듯이 각 인물들마다 거쳐 간 옛 길을 지도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각종 사료를 찾아 인물의 행적과, 지명과 장소의 변천 등을 꼼꼼히 조사한 흔적이 묻어났다. 현재의 장소를 직접 탐방하고 흔적을 찾으려 노력한 것은 물론이고, 당시의 계절과 날씨까지 동원하여 근거 있는 추론을 해냈다. 친절한 설명과 뛰어난 상상력 덕분에 옛 길을 오늘날처럼, 오늘날 길을 옛 길처럼 걸을 수 있었다. 나는 마산의 구석구석을 ‘도시의 얼굴들’과 함께 걷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다시 찾은 나의 마산은 더 이상 옛날 첫인상처럼 낡고 쇠락한 도시가 아니었다. 가만히 말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조금이라도 건드리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날 것처럼 보였다. 조용히 지금도 가쁜 숨을 쉬고 있는 역사의 현장이었다. 세월의 무상함보다는 세월의 존재감이 두드러졌다. 기억이란 대지 위에 켜켜이 사람들의 자취가 쌓여 역사라는 큰 토성을 쌓은 것 같았다. 책을 덮고 도시를 걷는다. 철길, 시장길, 골목길, 이젠 찻길까지, 평생 사람들이 다닌 길이다. 마산의 얼굴들을 기억하며 계속해서 걷는다.
이제 그 길은 종이 없이 펼쳐진 역사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