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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별 Nov 29. 2016

사진이 몽땅 사라졌다

잃어버린 사진, 잊어버릴 추억

또 일이 터졌다.


우연히 생각난 사진을 찾다가, 깨닫고 만 일이었다. 시작은 웃겼다. 룸메이트와 서로 몰아주기 엽기사진 찍은 걸 자랑하다가, "내가 기가 막힌 사진을 보여주지"라며 사진을 뒤진 것이 사건의 발단(은 아니지만... 이미 사건은 터져있었으므로)이었다.


난 구글 포토앱에 모든 사진을 동기화시켜놓고 있었다.


얼마 전  폰 상태가 말이 아니라서, 큰맘 먹고 '초기화'라는 걸 했다. 물론, 폰 사진을 모두 백업시켜놓았다. 바로 구글 포토앱에. 와이파이 상태가 안 좋은 상태에서 장장 며칠 동안 동기화하면서 수많은 사진들이 백업되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나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얼핏 보면 거의 대부분의 사진이 들어있기도 했다.


포토앱에서 그즈음 찍은 날짜를 검색하는데, 이상하게 아무런 사진도 없었다. 이때가 아니었나? 이리저리 스크롤을 올렸다 내렸다 하는데, '없다'. 일사불란하던 손가락이 일시정지. 뒤통수가 시큰하게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불안했다... 아니 이건 불시에 닥친 위험이다.


완전 '망했다'는 걸 알아차리는 데에는 오래지 않았다.


찾아보니, 내가 찍은 사진은 옛날 폰에 있던 사진 파일까지 다 저장돼 있었다. 문제는, '카메라' 앱 외에 다른 폴더에 있던 사진들이다. 소위 'kakaotalk' 폴더나 'download', 'screenshots' 폴더 같은 것 말이다. 내가 찾던 사진도 친구의 폰으로 찍어서 카톡으로 받았었던 것이므로 'kakaotalk' 폴더에 있어야 마땅했다. 그런데 없다. 모조리, 몽땅 없다.


상실을 받아들이는 5단계


그 뒤에 따라 나온 나의 심리상태는 소위 말하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환자의 심리상태'와 유사했다.

1) 사진이 없다고? 그럴 리가 없어. (부인)
2) 내가 옵션을 잘못 선택한 건가? 또??? 나는 왜 하루라도 멀쩡한 날이 없지? (분노)
3) 아냐, 무슨 방법이 있을 거야. 어떻게든 살릴 수 있을 거야. (협상)
4) 아... 거기엔 중요한 사진이 있는데. 난 이제 정말 망했어. (우울)
5) 이게 운명인 걸까? 신이시여. 정녕 이게 추억을 박제해 놓지 말라는 신의 뜻입니까? (수용)

 (출처: 심리학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죽음과 죽어감(On Death and Dying,1969)>, 죽음의 인지 모델 5단계 - 나무 위키)


방법이 없진 않았다.


SNS에 절망적인 상태를 그대로 토로하는 글을 올리자, 누군가 'Recuva'라는 복원 프로그램을 추천해줬다. "꽤 잘 살려내는 프로그램이니까, 중요한 자료가 있었다면 시도해 보세요. 그 전까진 가급적이면 아무 파일도 설치하거나 넣지 마시고요."... 친절하고 고맙다. 그런데.


솔직히 의욕이 없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 상황이 운명의 장난 같기도 하지만, 그 또한 내가 받아들여야 하는 운명인 것 같았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그냥 옛날 추억은 적당히 지우면서 살아라는, 그런 거대한 전지전능한 뜻이 있는 것만 같았다.


사실, 더 솔직히 말하면,

내가 잃어버린 사진의 팔 할은 다름 아닌, 옛 연애의 추억이다.


고백하건대, 헤어진 지 1년이 지나고 2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불구하고, 사진을 지우지 못했다. 그놈의 사진이 뭐라고, 심지어 나는 따로 폴더를 만들어놓고 비밀번호까지 걸고 숨겨놓고 있었다. 그걸 꺼내본 기억은 딱 한 번뿐이지만, 그래도 내 의지로 '보지 않는 것'과 보려고 해도 '볼 수 없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결국 인정해야만 했다. 나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되었던 게 분명하다. 지금의 절망적인 상태를 보아서는, 아직도 아쉬움과 후회로 덕지덕지 마음이 너덜너덜해진 걸 보노라면, 아직도 마음 한구석은 현실을 부정하고 우울해하고 있는 나의 모습을 보노라면.


문제는 따로 있었다. 정작 지워진 사진들이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아직도 이별을 받아들이는 5단계를 아직 다 거치지 못한 상태였던 것이다.



체념인 걸까? 아니면 달관인 걸까?


어쩔 수 없지.라는 생각은 한다. 하지만 이것이 올바른 '수용'의 마음가짐인지는 모르겠다. 조금은 체념에 가깝다고 해야겠다. 이왕 이렇게 되어버렸으니, 이걸 기화로 추억을 지우고 더 이상 과거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나름의 긍정적인 생각도 애써 해 본다.


하지만 체념보다는 좀 더 강한 수용에의 마음인 것 같다. 복구 프로그램을 소개받았음에도, 시도해보려는 의지조차 없는 걸 보면 그렇다. 이상하게도 아무런 행동의 의지가 없다. 단순히 귀찮아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아주 강한 힘이 내 두 발을 지금 이 순간에 찰싹 붙어있게 만드는 느낌이다. 더 이상 지질하게 행동하지 않겠다는 '부작위의 의지'가 표명된 것이리라- 생각해 본다.


그러다보면, 그렇게 지내다 보면, 어느새 변화해 있겠지. 아직은 과거의 실낱같은 기억의 끈을 붙잡으려 하지만, 조금 더 멀어지면 어느새 아무렇지도 않게 되겠지.


추억은 이제 솜사탕처럼, 한 번 두 번 홀짝거리며 그 순간의 달콤함을 누린 뒤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주욱 실사탕을 늘여봐도 감쪽같이 사라지는 추억이여. 하지만 이미 그런 달콤한 기억 하나 있었다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그것으로 만족할 때도 되었다. 눈으로 꼭 확인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눈으로 확인해야만 알 수 있는 것은, 추억이 아니라 사실일 뿐일 게다.  


그렇게 우리는 추억을 잊고 이별을 받아들인다.


나는 사진을 복구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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