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르기즈스탄에서 존재의 이유 찾기
한국을 떠나오자마자 시끄러워진 한국, 그리고 너무 함께하고 싶었던 집회였기에 더욱, 토요일마다 페북 라이브를 티비처럼 틀어놓고 지냈다.
소용이 없다는 걸 알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기껏해야 이런 류의 '간절히 지켜봄'이다.
한국에 있었어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기껏해야 '시위에 참석해서 간절히 지켜봄'이었겠지만, 사람들과 함께 동지애를 나눌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차이점이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내가 이토록 무력감을 느끼는 건 사람들과 함께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내기보다는 그저 소속감의 박탈이 제일 컸던 것이다. 솔직히 말해.
나는 이곳에 왜 온 걸까.
떠나기 전 어떤 이가 물어보았다.
"도대체 무슨 큰 꿈을 꾸길래 가려고 하는 거예요?"
딱히...딱히.
심지어 그 질문이 나를 비꼬는 것처럼 들렸다.
큰 꿈도 없었고 단지 생각의 경로가 조금 달랐을 뿐, 1도 차이의 간극이 나중에는 크레센도처럼 매우 커졌을 뿐. 나도 이렇게 되리라곤 불과 몇 달 전까지는 실감하지 못했다.
이런 나에게 '무슨 큰 꿈'을 바라겠나, 나 스스로에게도 설득하지 못한 지금의 결과에 대해서.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아직 알지 못한다.
처음에는 그게 자유라고 생각했는데, 또다른 일상이었던 것일지도 모르고, 더 많은 좋은 사람들인 건지도 모른다. 어쩌면 예측 불가능한 삶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무엇을 바라는지 그것을 알기 위해서 온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마음 편하다.
소속감. 나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찾아 헤매던 것.
가족이었고 대학이었고 직장이었고 마산이었다. 여성이었고 내 나이 또래 사람들이었다. 또한 (애증이었지만) 서울이고 한국이었다.
아직까지 마음이 붕 떠 있는 것은 그놈의 소속감을 찾지 못해서일 것이다.
현지어를 배우다가 너무 힘들어서 뭐라도 좀 사먹으려고 매점 앞을 갔는데, 사람들을 헤치고 초코바 하나 달라는 말을 못할 때, 눈물이 찔끔 나왔다.
나는 이곳에 겨우 이방인일 뿐이었다.
계좌가 막혔다는 것을 알았을 때
해외 IP주소 차단서비스때문에 내가 내 계좌를 이용하지 못하다니...
바쁘다는 핑계로 축의금도 제대로 주지 못한 친구들에게 민폐였고, 정산하지 못한 카드비와 통신비는 결국 부모님이 다 내 주셔야만 했고, 모아둔 돈을 쓰지 못한다는 사실에 엄청난 불안감이 밀려왔다.
진정한 무급 봉사자의 마음가짐이 되어있지 않았던 것이다.
믿는 구석이 없게 되자, 소속한 곳이 멀어지게 되자, 나는 무척 혼란스러운 상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요며칠 눈은 펑펑 나리고, 얼어붙은 나뭇가지, 앞이 보이지 않는 도로, 창밖을 바라만 보는 무기력함을 더해 세상에 이런 고립무원이 없을 것만 같았다.
여행자 코스프레는 이제 끝났다.
내가 여기 온 이유는 까뮈의 "햇빛이 너무 눈부셔서" 이 주옥같은 한 마디를 몸소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일상은 지루한 것 또는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라, 거친 현실일 수도 있다고 누군가에겐 미운 일분 일초가 될 수가 있다고 그렇게 일상을 또 다르게 바라본다.
이곳에 집중해야 겠다는 생각은 마음만 마음 뿐이었는데 이젠 페이스북 앱을 지웠다.(내가 앱을 지운 게 어디 한두번인가마는)
미운 학생을 대하는 선생님처럼 인내심을 갖고 이곳에, 이 아직도 낯선 곳에 먼저 다가가려고 노력해야 한다.
어젯밤 12시간을 잤는 데에도 근심걱정은 덜어지지 않고 세상엔 더욱 더 눈이 쌓여 있다.
또다시 나는 평범한 이곳의 일요일 정오를 마주하고 있다.
그렇게 나는 다시 브런치로 돌아왔다.
20. Nov.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