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당탕탕 집밥 일기
옛날 우리 집은 정월대보름에 구수한 냄새가 났다. 엄마는 며칠 전부터 시장에서 묵나물을 사놓으셨고 (국산을 살까 말까 갈등하시며) 각종 잡곡과 견과도 사놓으셨다. 대보름날 밥상에는 콩이 듬뿍 올려진 찰오곡밥이 윤기를 좌르르 뽐내며 그날만큼은 고봉밥으로 올라왔고, 몇 가지인지 모를 대략 대여섯 가지 나물이 때깔 좋고 먹음직스럽게 차려졌다. 저녁에는 아빠가 호두를 깨고 옆에서 부스러기 호두를 집어먹는 것도 즐거웠다. 정월대보름은 언제나 그런 건 줄 알았다.
결혼을 하고 나니 저절로 차려지는 밥상은 없었다. 전통이란 누가 챙겨주는 게 아니었다. 둘만의 단출한 식구 중에서 정월대보름을 걱정하는 건 오로지 나뿐. 남편은 이날 특별히 오곡밥을 먹어본 적이 없다고 해서 많이 놀랐다. 그래서 더 챙겨주고 싶은 마음, 에이 그럼 그냥 챙기지 말까 하는 마음이 반반 씩 들었다. 승자는 항상 전자였고 ‘그래도 정월대보름을 챙기자’는 마음이다. 하지만 옛날 엄마처럼 제대로 된 밥상을 차리기는 아무래도 역부족이다.
지금 정월대보름이란
작년에는 살던 집 바로 근처 시장이 있어 재료를 사기 수월했다. 오곡밥에 들어갈 콩이나 잡곡을 한 줌씩 따로 팔고 건나물도 종류별로 있었다. 그땐 아주머니들이 옆에서 부리나케 집어가는 것들을 똑같이 따라 샀다. 나는 무슨 용기로 한 번도 해본 적 없던 묵나물을 무쳤다. 근데 그걸 또 시댁에 들고 갔다.
어머님은 나물을 맛보시더니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셨고 ‘아니 나는 괜찮다’고 물리셨다. 실망하던 찰나, 옆에서 형님께서 내가 한 나물을 가져다 드시겠다고 해서 형님께 고마웠던 기억이 있다. 작년을 생각하면 나도 참 대책 없이 굴었다.
올해는 좀 쉽게 가기로 했다. 이사 온 집 옆에는 시장도 없고 마트에선 잡곡을 조금씩 팔지도 않는다. 대신 마트에는 오곡밥 키트랑 대보름 나물 팩을 팔고 있었다. 다 된 걸로 사서 그냥 차리면 되는 줄 알고, 잘 됐다 싶어서 얼른 구매했다.
근데 그걸 며칠 전부터 사놓은 거라 나물이 살짝 걱정됐다. 정월대보름보다 하루 이른 날 일단 밥상을 차리기로 한다. 나물팩 뚜껑을 열었는데 이게 왠열. 나물이 완전히 다 무쳐서 나온 게 아니라 그냥 말리기만 하고 포장된 것이었다. 그제야 자세히 보니 설명서에는 나물을 씻어서 잘라서 볶으라고 돼 있다. 아, 이게 아닌데.
결국 나물을 다 따로따로 씻어서 잘라서 무쳐서 볶았다. 다 된 걸 1분 만에 내놓으려던 계획을 비웃기라도 하듯, 나물을 하는데 1시간이 걸리고 말았다. 그런데도 급하게 해서 그런지 이상하게 맛도 없고 질겼다. 꾀를 부려서 벌 받은 거라고 생각하자. (근데 정말 내가 한 나물 반찬은 왜 맛이 없을까...)
밥상을 살린 배추된장국
아무튼, 다 망해 가던 밥상을 살린 건 국이었다. 사실 오곡밥과 나물반찬만 있으면 뭔가 심심해서 국을 해야 할 것 같은데, 검색해 봐도 대보름 밥상에 정해진 국은 없는 것 같았다. 뭘 하지 고민하던 중 알배추가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어 배추된장국을 하기로 했는데, 의외로 오늘 밥상이랑 너무 잘 어울렸다. 나물반찬만 있으면 남편이 서운해할까 봐 소고기를 좀 듬뿍 넣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정말 맛있어했다.
<소고기배추된장국 레시피 (2인분)>
1. 재료 준비 – 배춧잎 6장, 파 반 대, 소고기(국거리) 200g, 된장 2T, 다진 마늘 0.5T, 고춧가루 적당히
2. 다시 국물 내기 – 물 600ml에 멸치, 다시마, 건새우, 양파 속껍질 정도를 넣고 국물을 우린다. (멸치 다시 코인 1알로 대체 가능하다.)
3. 배추된장국 끓이기 – 집 된장 2 숟갈 풀고 나서, 자른 배춧잎을 넣고 끓인다.
4. 소고기 넣고 끓이기 – 찬물에 해동하고 피를 뺀 소고기에 마늘 0.5T 넣고 무친 다음, 국에 넣고 끓인다.
5. 얼큰하게 맛 내기 – 송송 썬 파 반 대를 넣고 고춧가루를 1~2 숟갈 넣으면 얼큰한 맛이 제법 난다.
* 참고한 레시피 링크: https://www.10000recipe.com/recipe/4527184
우여곡절 끝에 정월대보름 밥상이 완성됐다. 오곡밥은 콩도 없이 찰기만 가득한 잡곡밥이고, 나물반찬은 아홉 가지를 하기는커녕 마트에서 대충 산 모둠 팩으로 급조한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신랑이 이게 정월대보름 밥상이라고 생각하도록 하는 게 좀 미안하기도 하다. 그래도 밥과 나물, 맛있는 국이 있는 어엿한 밥상이었다. 솔직한 우리 신랑은 나물은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연신 국이 맛있다며 칭찬을 한다. 그래, 맛있으면 됐지!
보름달을 기다리는 마음
어젯밤엔 휘영청 달이 밝았다. 하루 먼저 벌써 보름달에 가까운 달이었다. 오늘 밤 보름달을 볼 수 있을 거라 무척 기대했는데. 하지만 아침부터 눈이 내리는 걸 보아하니 보름달을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소원을 빌고 싶었는데, 눈이 온 세상을 덮고 달도 멀리 숨을까 봐 아침부터 조마조마한 마음이다.
그럼에도 오늘 밤엔 달이 없어도 소원을 빌어야 하겠다. 어제오늘 뉴스를 보면 안타깝기 그지없는 어린아이의 죽음을 추모하고 싶다. 이 세상 모두가 한가롭게 정월대보름을 즐길 수 없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프고, 그 누군가에게 닥친 불행을 조금이라도 나눠 갖고 싶은 마음이다. 증오하고 해를 끼치려는 그 한 사람 범인만이 문제는 아닐 것이다. 더 교활하고 의뭉스럽고 뻔뻔하게 타인을 갉아먹는 모든 사람들까지 상상하게 되며, 세상의 모든 존재 자체가 두려운 마음까지 든다.
달님, 제발 우리가 서로 남을 위하는 세상이 되게 해 주세요. 서로를 증오하지 않고 사랑하게 해 주세요. 기도드립니다. 춥고 시린 오늘 같은 날, 도통 희망이라곤 보이지 않지만 우리 모두 기도하는 달 하나쯤은 마음속에 품고 살아가길 바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