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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별 Jan 22. 2017

얄궂다, 기억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닌 일

고3, 우리는 충동적으로 바다에 갔다.


오늘 문득 생각났다 


벌써 10년 전인가?


내 인생 최대의 일탈이었는데,


마지막 모의고사를 개떡으로 치고


수능에 대한 불안감으로 한시도 가만있을 수가 없었던


우리 별로 친하지 않았던 앞자리 뒷자리 우리,


갑자기 바다가고 싶다


이 한마디에


정답 체크하고 뭐고 다 필요없고


곧바로 택시타고 시외버스터미널을 갔었더랬다


무슨 사랑의 도피라도 하는 것처럼 심장은 벌렁벌렁


그 때 내 휴대폰 스카이 폴더 하나 꾸욱 움켜쥐고


형형색색 조명이 밝은 낡은 부산행 버스에 타자마자


난 피곤에 잠이 들었다


광안리까지 가는 걸 결정했다는 것 자체가 매우 피곤했다


뭐 어째저째 실컷 고생하며 광안리를 찾아갔던 것 같다


도착하니 벌써 8시쯤이었나


까만 바다에 아무 것도 없었다


광안대교에 불이 켜져 있었는가 잘생각도 안나는데


불이 켜지지 않았을 리가 없는데


불이 꺼져있었던 것 같다 왜그런 생각을 하냐면


너무 칠흙같이 어두운 밤, 너무 까만 백사장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짝 실망했던 것 같다


시원한 바다, 뭔가 탁 트인 바다를 기대하며 도망쳐 왔는데


결국 거기엔 우리의 두려움이 그대로 담긴


까만 하늘과 까만 바다였다,


결국 우린 피할 곳이 없었던 것이다,


백사장, 아니 흑사장을 걸으면서


우린 괜히 쓸데없이 바람을 맞고 다녔다


우리를 신경도 안쓰는 소리만 들리는 파도와 바다냄새만 나는 바닷물에 가까이 가 보았다


뭔가 멋있는 말을 모래 위에 남기고 싶었지만


딱히 우리는 멋있는 것 같지 않았다


막 고함을 질러볼까 생각도 했지만


딱히 고함을 지를 이유도 없는 것 같았다


그래도 괜히


괜히 뭔가를 썼던 것 같다


그래도 괜히


소리도 질러 보았던 것 같다


여기까지 왔는데, 이런 생각으로


목욕탕까지 왔는데, 때는 밀고 가야지


이런 심보였던 것 같다.


뭔지 모르게 답답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털어내고 싶었다


그땐 그게 최악이었는데


그땐.


아참,


나 그 때 처음으로 스타벅스를 갔었다.


생각해보니 대학 입학해서가 아니라 그날 처음으로 카페에 갔다.


나보다 훨씬 '깨어있던' 나의 친구는


나를 스벅으로 인도해 주었다.


처음 본 스타벅스라는 곳은 뭐랄까


딱 미국같은 곳이었다.


고등학교 때에도 커피는 먹으면 안된다는 말에  


레쓰비 하나도 입에 대지 않았던 나에게


커피를 고르라니, 저기서, 저 복잡한 메뉴들 속에서,


이건 마치 백사장에서 잃어버린 팔찌를 찾는 것처럼 막막했지만


나는 용감하게 에스프레소를 시켰다


왜냐하면 언젠가 영어테이프에서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영어공부 절대로 하지 마라'에 나왔던 주인공은


'Espresso, please' 라고 했었다.


나는 에스프레소가 가장 흔한 커피의 한 종류인 줄 알았다


근데 망할...


최악이었다


친구도 당황했다


그녀도 에스프레소까지는 몰랐던 것이다


우유를 같이 시켰다, 섞어먹으면 좀 나을까 해서


근데...


아까보다 연해지기는 커녕 점입가경이다


씁쓸한 맛이 더욱 씁쓸한 이 상황을 어쩐담...


결국 우유로 잔뜩 장난친 에스프레소를 어찌하지 못하고


그만 아까운 그 커피를


눈물 쏙 빼고 얼굴에 인상만 쓰고 버리고 왔다.


휴우... 너무 힘들었던 나의 카페 첫 경험.


어느새 시간은 9시 반이었나,


다시 시외버스를 어렵사리 타고,


훨씬 어둑하고 형형색색의 조명이 어지러운


불법 관광버스 삘 나는 그런 시외버스 뒤쪽 귀퉁이에 앉아


피곤과 아쉬움을 잔뜩 짊어지고


집에


가는데


앗..


(충격적인 일이 떠올랐다)


친구는 갑자기 얼굴이 사색이 됐다


왜, 라고 묻자 그녀는


아니 이쪽에 보지마


난 원래 안보였는데 그녀의 말에 더욱 보려고 애썼다


그러자 그녀는 안돼 보지마


그러면서 내 얼굴을 감


저기 이상한 아저씨가 있어


막 만지고 있어


성교육을 받은 나는 그게 뭘 만지는 건지 알 수 있었고


갑자기 너무 무서워졌다


하지만 내 친구는 너무 든든했다


그녀는 아저씨를 무서워하지 않고 아저씨에게 화가 난 듯 했다


그래 나도 그때부터 화가 났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못 가


우리는 잠에 들었다


너무 피곤했던 것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 본 스타벅스에서 이상한 에스프레소와 씨름을 했고


까마득한 밤바다와 정처없는 대화를 했고 (그래 그때 밤바다는 마치 외계인 같았다)


한시간 넘게 버스를 타고 물어물어 지하철을 타고 부산 그 유명하다는 광안리에 도착했고


야자를 빼먹고 나오느라 책상에 책을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화장실을 간 것처럼 보이게 할까 고민했고


마지막 모의고사라고 어찌나 선생님들은 강조를 해대는지 이걸 못치면 수능을 못치고 대학을 못가고 시집도 못가는 줄 알았고


오늘 하루가 왜그리도 많은 일들이 일어난 것 같았는지


너무 피곤했던 것이다


우린 다시 마산에 도착했다.


그리고 학교에 갈까 집으로 갈까 하다가 그냥,


집으로 가기로 했다.


그 폴더폰으로 엄마께 전화를 했다.


그제서야 이실직고를 했다.


오늘은 데리러 오지 마세요 엄마, 제가 곧바로 집에 갈게요,


왜냐면 지금 학교가 아니거든요,


지금 여기요?


시외버스터미널이요,


그냥 부산에 갔다 왔어요


왜 갔냐구요?


바다보러 갔어요.


엄마는


별 말씀 안 하셨다.


의외였다.


사실 그건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던 거다.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집으로 갔다.


그리고 그 다음날 또 아무렇지 않게 학교를 갔다.


뒷자리의 내 친구는 지금 연락이 없고


광안리는 그 때 이후로 한 번도 간 적이 없고


바다에 고함치는 건 유치한 짓이란 걸 깨달았고


에스프레소는 이제 아무렇지 않게 시켜먹고


모의고사는 그냥 모의고사일 뿐이었다는 걸 안다.


지금은 또 아무렇지 않게 잘 살고 있다.


그런데 오늘 문득 그랬다


지금 내가 바다라면,


그 친구랑 다시 광안리를 간다면,


또 똑같은 칠흙같은 밤일까?


10년 전이나 오늘이나 파도는 여전히 말없이 치고 있을까?


:


얄궂다,


나에게 그날이란


그 때 그 순간이란,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다


기억하지 않으면.


01. MAR.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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