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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별 Feb 20. 2017

혼자 이십 대 여성이 서울에 산다는 것

애증의 도시, 서울


나의 이십대는 서울이었다.

그리고 나의 이십대에 발 붙인 모든 곳은 (온전히 사랑스럽지 못한) 애증의 곳이다. 내가 이름붙이길, 서울은 서럽고 울적한 곳이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혼자 젊은 여성이 서울에 산다는 건 절대 낭만적이지 않았다.



나는 내가 이곳에 사는 것을 누구라도 아는 것이 두려웠다. 특히 가끔 동생 없이 혼자 살 땐 더더욱 그랬다. 내 퇴근길을 관찰하는 사람이 있는지 항상 두리번거리고, 택배주소지를 갈기갈기 찢으며 신상이 유출되지 않도록 조심했고, 집은 항상 곧 어디를 떠날 듯 짐을 만들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택배기사가 와도 아무도 없는 척,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되었다.



나는 살고 있으나 사는 것처럼 살지 못했다. 서울이 애증의 도시란 건 그때문이다.  독립했으나 독립한 것이 아니었다. 전세집이었을 때 보증금은 부모님이 마련해주셨고 기어이 내가 낼 꺼라고 월세로 바꿨을 때도 부모님께 빚진 게 많았다. 엄마는 몇 달에 한 번씩 국과 반찬을 보내주셨다. 심지어 밥까지 얼려 보내주셨다. 나는 그만 보내달란 말을 하면서도 아기새처럼 잘만 받아먹었다. 다 큰 뻐꾸기같이.



언제쯤 제대로 된 삶을 살게 될까.


 나는 이십대를 벗어나면 조금은 사람답게 살게 될 것을 기대했다. 나이에 빌붙어 철들고 싶다는 생각, 서울을 벗어나면 조금은 덜 우울해질 거란 생각.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그 마음이 간절해서 나는 이곳에까지 오게 된 것 같다. 아직도 잘 실감나지 않지만, 나는 삼십 대 여성으로서 혼자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또다른 형태로 실감하고 있다.


더는 하고 싶지 않은 게 무엇이냐면, 더는 나를 숨기고 살고 싶지 않다. 이웃들이란 사람들과 마주치기 싫어 엘레베이터를 타자마자 닫힘을 누르고 싶지 않다. 더는 인스턴트 방식으로 살고 싶지 않다. 전자렌지에 의지하지 않고 밥을 먹고 싶다. 말하자면, 산다는 것이 낭만적이지 않을지는 몰라도 더는 두려움이란 구속 속에서 살고 싶지 않다.


-추신-
혼자를 기르는 법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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