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라는 원죄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울 것인가

by 별별

태어날 때부터 예외없이 죄인이 되었다는 '원죄설'을 믿지 않았다. 본디 자유로운 영혼을 쓸데없이 구속하는 종교적 신념에 불과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교적 의미를 떠나서, 어떠한 천부적인 탄생 그 자체가 괴로움의 원인이라면 그것은 '원죄'라 불러도 좋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원죄를 믿게 됐다.




내 인생의 모토는 어느새 '자유'였다.


입버릇처럼, 나는 "자유로운 영혼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대체 왜 자유롭고 싶은 걸까? 나에게 자유는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자유는 너무 애매하고 포괄적인 꿈이다. 스스로도 정확히 어떤 자유를 추구하는지 정확히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내 안에서 너무나도 강한 외침이 들려오는 걸 부인할 수는 없었다. 아마도 태어날 때부터 나의 울음소리는 자유를 외치는 소리였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자유에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고 한다. '무엇으로부터의 자유' 혹은 '무엇으로의 자유'. 어떤 구속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과 어떤 것을 지향하는 움직임을 통틀어 자유라고 부른다. 내가 처한 현실을 탈피하여 이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모두 자유로운 행위인 것이다.


무엇으로부터의 자유


일차적으로 현실을 탈피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내가 이러한 자유를 추구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조차 생각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나의 정체성을 이루고 있던 중요한 부분을 떼어내거나, 혹은 지금까지의 나를 부정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런 마음의 준비를 하기에는 스스로도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는 무엇인가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걸, 아니 반드시 벗어나야만 한다는 걸, 솔직히 말해서 알고 싶지도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분명히 깨닫고야 말았다.


그 무엇은 바로 '가족'이라는 사실


그 사실을 깨닫는 것은 정말 고통스러웠다.



나는 봉사를 하기 위해 꽤 오랜 시간 한국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그동안 내가 왜 가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이 항상 존재하고 있는 터였다. 나는 왜 봉사를 하려 하는가, 나는 왜 떠나야만 하는가. 100명이 나에게 물어봤다면 나는 1000번도 더 넘게 스스로에게 자문했을 것이다.


1000번의 물음과 1001번째 해답


"막연한 죄책감 때문에 나는 봉사를 해야 한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 천 번의 해답은 모두 틀렸다. 단순히 막연한 죄책감 때문이 아니었다. 이것은 내가 태어났기 때문에 짊어질 수 밖에 없었던 분명한 죄책감 때문이었다.


나는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태어났다.


나는 유복한 집에서 태어났다. 그렇다고 해서 재벌가나 뭐 그런 대단한 집안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다. 매 끼니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매 학기 등록금 낼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정도의 어찌보면 '평범한' 집이었다. 하지만 주변에 일용직 노동을 하시는 친척을 보더라도, 학자금 대출을 받는 주변 친구들을 보더라도 나는 우리집이 잘 산다고 느꼈다.


나는 좋은 부모 밑에서 자라났다. 아버지는 내가 넘볼 수 없는 통찰력으로 저절로 존경심이 나올 만한 분이었으며, 어머니는 내가 도저히 따라할 수 없는 성실함으로 헌신을 다해 우리를 키우셨다. 그 두 분 밑에서 나는 '부족한 것 없는 딸'로 자라날 수 있었다.


문제는 내가 이런 좋은 환경에서 태어났다는 게 문제인 것이다. 우연히 내가 선택할 수 없는 선천적인 이 모든 조건이, 나에게는 단순히 볼 문제가 아니었다. 불편함이 들었다. 이건 불만을 가지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감정이다. 감사하고 또 감사함을 넘어서 부끄러움과 미안함이 들었고, 그와 동시에 이런 환경을 당연히 여겨도 되는 것인가 하는 집요한 궁금증이 나를 괴롭혔다. 이건 한마디로 죄책감이었다. 하지만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떠안게 된 죄책감이었다.


나는 원죄를 짊어지고 태어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떻게 보면 배부른 소리일지도 모르겠다. 그 비아냥을 스스로에게도 해 왔던 터였다. 감사하면 그만 아닐까? 왜이렇게 쓸데없는 생각이 많지? 부모님께 감사하고 우연히 태어나고 자라난 환경에 감사하자. 스스로 이렇게 다독여 보았지만 마음의 짐은 가벼워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나는 정의하게 됐다.


원죄:
1) 이 모든 행복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졌음
2)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존재는 필연적이지 않음


또한 나는 요구되는 행동을 직시할 수 있었다.


반성:
1) 나의 존재가 결과론적으로 감사한 대신에 필연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2) 내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진 모든 것들에 대해 비로소 나의 의지를 개입하여 선택하고 책임진다.


정의를 내리니 분명해졌다.


나는 부족함 없는 환경에 죄책감을 느끼고 나의 존재에 책임져야만 한다


무수히 많이 번뇌했지만, 내가 봉사를 가려는 이유는 바로 나의 알 수 없는 죄책감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비로소 내 의지를 발휘하기로 작정하였다. 일생의 가장 고민이 많은 시기에 봉사를 떠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끊임없는 반성에 따른 자연스러운 행위가 아닐까 한다.


다만 그 죄책감의 근원은 바로 나를 있게 한 부모님이라는 것


부정적인 어감 때문에 구속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지만, 가족은 분명히 나에겐 태어날 때부터 구속하고 있었다. 가족은 나에게 행복한 존재로 태어났다는 원죄를 부여한 곳이었으며, 나는 이 원죄의 근원으로부터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었다.


때문에 내가 반드시 극복해야만 하는 현실은 바로 가족의 안락한 품이었다. 현명한 아버지의 딸, 헌신적인 어머니의 딸, 좋은 교육을 받고 안전한 환경 속에서 자라올 수 있었던 부모님의 배려, 이 모든 게 극복해야만 하는 대상이었다. 그걸 깨닫는 것은 그 자체로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지만, 이제 난 행동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과연 부모님은 날 이해하실 수 있을까?


부모님이 나에게 느끼는 보호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다면, 나는 그 보호로부터 벗어나야만 하는 의무감이 있다고 믿는다. 내가 독립된 존재로 살아가기 위해, 세상에 책임감을 갖기 위해, 어쩌면 당연한 자각을 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 스스로도 이런 사고의 과정에 이르기까지 어려움이 많았다.


부모님을 탓하려 하는 것이 아님을, 어쩌면 오해와 슬픔을 낳을 수도 있는 '원죄'라는 나만의 정의. 이 모든 것들에 대해 나는 더이상 솔직해지면 안 될 것 같다. 솔직히 말하면, 이해를 해 주시리라는 자신이 없다. 나는 부모님께 너무 많은 것을 받고도 또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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