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이름은

<2> 너는 꽃이 되고 별이 되었다

by 별별


정식으로 학교에 부임하기 전에 잠깐 이곳 탈라스에 머무른 적이 있다. 이른바 OJT 기간이다.


(이땐 홈스테이를 하면서 그 지역 문화를 몸소 체험한다. 첫날 집주인 아주머니께서 '아이뻬리'라고 키르기스어 이름까지 지어주는 바람에, 나는 뭔가 이곳 문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된 느낌이었다.)


OJT 때는 준비기간이기 때문에 수업을 하진 않고 학교 분위기를 익히는 게 다다. 나는 실제 수업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보기 위해, 주로 다른 선생님들의 수업을 참관하며 교실 뒤에 앉아있곤 했다.


그런데, 우연히 학생들 앞에 선 적이 있었다.


감기가 유행하던 때라 다른 선생님들이 많이 편찮으셔서 갑자기 나에게 수업에 들어가지 않겠느냐고 물어보시는 것이다. 아니, 내가 대답할 겨를도 없이 나는 수업에 들어가는 걸로 되었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라 당황스러웠지만 무진장 설레기도 했다.


+


처음으로 교단에 서자 무척 떨렸다. 수업 준비는커녕, 말할 거리도 없었다. 그땐 정말 현지어도 안 되는 상황이고 말이다. 간단히 내 소개를 하고 나니 말문이 막혔다.


궁여지책으로, 아이들 이름을 물어봤다. 한 명 한 명 얼굴도 볼 겸, 인사도 할 겸, 시간도 때울 겸.


- 안녕? 이름이 뭐니?

- 잔아라

- 네 이름 뜻은 뭐니?

- '아름답다'예요.

- 아름답다? 와 정말 아름다운 이름이구나.


그리고 아를란, 알뜨나이, 누르기자, 베르메트, 탈갓, 알름벡... 한 사람씩 물어보면서 칠판에 서툴지만 또박또박 이름을 써 보았다. 아이들에게 이름의 뜻을 전해 듣고 인사를 했다. (다행히 고학년이라 영어로 대화가 가능했다.) 하나같이 열심이었다. 키르기스 학생들은 자신감 있고 자랑스럽게 자기 이름을 말하는 느낌이었다.


잔아라 - 아름다운

아를란 - 빛나는

알뜨나이 - 황금 달

누르기자 - 빛나는

베르메트 - 보석

탈갓 - 커다란

알름벡 - 영웅


그럴 만도 했다. 키르기스어 이름에는 하나같이 뜻이 생생하게 살아있었다. 한 명 한 명 이름을 듣고 그 뜻을 들으면서 감회가 새로웠던 것 같다.


말로만 듣던 키르기스스탄, 막상 이곳에 도착해서도 실감이 나지 않았던 키르기스스탄이었다. 어렴풋한 이곳의 이미지가 선명하게 내 눈 앞에 되살아나는 느낌이었다.


'이 낯선 이름이 내가 앞으로 부르게 될 이름들이다. 이 학생들이 바로 내가 가르칠 학생들이다.'


이름을 물어봤을 뿐인데, 그리고 이름을 불러봤을 뿐인데, 그들은 비로소 내게 '꽃'이 된 느낌이었다. 이름을 알게 된다는 건 그렇게 묘한 매력이 있었다.


+


그날 밤, 나는 윤동주의 시 <별 헤는 밤>을 떠올렸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봅니다...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소년들의 이름과)... 이곳 사람들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하나하나 불러보았던 이름이 별처럼 내 마음에 박혔다. 따뜻한 눈인사, 생기 있던 아이들의 표정, 그날의 소란스러운 분위기가 작은 목소리의 기억과 함께 따뜻하게 내 마음속에서 빛나는 것 같았다.


+


이쯤 되면 궁금한 내 이름... 사실 내 이름인 '아이뻬리'에도 예쁜 뜻이 있다.


아이 - 달

뻬리 - 요정, 천사


달의 요정이라니. 하하. 우리나라에서 통용되는 말로 바꾸면 '월궁항아' 쯤 되려나. 그래, 나는 아이뻬리다, 나는 달의 요정이다.ㅋ 본래 이름 '벼리'와도 발음이 비슷하고 뜻도 정말 예뻐서, 나는 내 이름이 정말 마음에 든다.


'저는 아이뻬리입니다'라고 소개하는 게 익숙한 요즘, 그래서인지 조금씩 키르기스스탄이 익숙해지고 있다. 하나같이 낯설던 아이들의 이름도 조금씩 익숙해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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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그런데, 내 이름을 궁금해했다. 아이뻬리말고 내 '진짜 이름' 말이다. 한국어를 전혀 알지 못하던, 갑작스레 수업에 들어가 아이들 이름을 물어볼 당시에도 그랬다. 아이들은 당신의 한국 이름이 뭐냐고 물었다.


내 이름은 '신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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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보진 못하겠지만 한글로 정성을 다해 또박또박 써줬다. 아이들은 신기한 표정으로 그 글자를 쳐다보았다.


아이들은 내 이름을 보며 나와 같은 느낌이었을 것이다. 별 하나가 마음에 박혔을 것이다. 어렴풋이 들어보기만 했던 '까레이'는 갑자기 그들 눈 앞에 서 있는 어떤 사람이 되었다.


+


"아이뻬리 에제(선생님)"


이젠 이렇게 부르면 뒤를 돌아본다. 하지만 '신벼리'는 여전히 그들의 눈동자에, 그들의 공책 한편에 살아 숨 쉰다.


(삐뚤빼뚤) 신벼리.


마음속에 박힌 별 하나가 내 이름이기를 바란다. 그렇게 어렴풋한 한국이란 곳이 점차 생생하게 살아났으면 좋겠다.


내가 너의 이름을 보며 그랬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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