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제멋대로 흘러간다

탈라스에서의 이별

by 별별


#1

귤이 잔뜩 터져 있었다. 아까 오는 길에 귤 한 봉지를 샀다. 나중에 살펴보니 귤 두어 개가 무르다못해 아스라져서 봉지에 가득 귤즙이 흥건했다. 아... 이런 불량식품을 팔다니. 그냥 두기엔 너무 귤 상태가 안 좋았다. 화가 나서 다시 바꾸러 갔다. 터진 귤들을 가리키며 바꿔달라고 했다. 아까 그 귤을 팔았던 직원은 어안이 벙벙해서 귤만 쳐다보고 있고, 주인은 내게 어서 귤 두 개를 새로 쥐어주며 얼른 보내려고 했다. 씩씩거리며 발걸음을 돌려 나오는 길에, 번뜩 뒷골이 싸해지며 어떤 기억이 떠올랐다.


#2

선배단원 집에 도착하니 10시 반이었다. 11시에 출발할 예정이다. 평소처럼, 그 집 옷걸이에 패딩을 걸어놓으면서 온통 어수선한 집을 둘러보았다. 아직 집에서 짐을 빼지도 않았는데, 새로 들어올 사람이 벌써 짐을 옮겨다놓고 있다. 출발하려면 시간이 좀 남았지만 앉기에도 뭐 한 느낌이다. 계속 서 있다가, 쓰레기 몇 개 주워 담다가, 주섬주섬 짐 정리 하는 시늉 내다가, 문득 귤 봉지에 잔뜩 물이 고여있는 걸 발견했다. '쯧쯧쯧... 귤이 다 터져버렸네.' 한숨을 푹 내쉰다. 이 귤들처럼 나도 꼴이 말이 아니다. 퉁퉁 불어버리고 푹푹 터져버린 것 같은 느낌이다. 도저히 웃을 수 없는 지금, 게다가 유난히 정신없고 낯설게 느껴지는 이곳.


#3

11시가 다 돼 가자 몇몇 분들이 오셨다. 선배단원과 반갑게 인사하고, 잠시 몇 마디 인사를 나누다가, 시간이 다 됐다며 내려가기로 한다. 트렁크를 옮겨주시는 덩치 큰 남자분을 필두로, 가방을 서로 들어다주려고 몇 명이서 앞다퉈 짐을 내렸다. 알고보니 선배단원이 근무한 학교의 선생님들이라고 한다. 나도 터진 귤을 포함한 물과 주전부리, 기타 선배단원이 잊고 간 모자와 장갑 등을 챙겨 따라 내려갔다.


#4

아무래도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 잠깐만 계세요. 귤 좀 바꾸러 갔다 올게요." 곧 떠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나는 아무래도 이게 마음에 걸렸다. 아까 귤을 샀던 가게로 달려갔다. 분명히 좋아보이는 귤을 가리키며 이거 달라고 말했는데, 보이는 것 말고 밑에 있던 게 상태가 안 좋았나~ 영문을 알 수 없이 터져버린 귤이다. 이걸 바꿔야겠단 생각 밖에 없었다. 가게로 달려가서, 단단히 별렀다는 표정으로 "나쁜, 나쁜 귤"을 말하며 결국 귤을 바꿨다.


#5

오는 길에, 그런데 뭔가 슬로우비디오처럼, 갑자기 앞에 보이는 풍경이 아득해지는 것이었다. 그제서야 욱씬거리는 어깨가 내 정신을 붙잡았다. 패딩엔 다 털지 못한 흙먼지가 묻어있었다. 잠시 메멘토의 주인공처럼, 기억을 더듬고 다시금 천천히 기억해냈다.


#6

나는 아까 완전히 넘어졌더랬다. 그야말로 땅바닥에 슬라이딩~ 했다. 귤을 사고나서 길을 건넜는데, 갑자기 맘을 바꿔 맞은 편 빵 가게로 다시 달려오던 참이었다. 차를 피해서 건너가느라 양쪽에만 주의하고 정작 앞에 놓여있던 턱을 보지 못했다. '이건 아닌데' 찰나의 생각이 스치면서 내 몸은 공중을 덮쳤다. 아주 잠깐이지만 하늘을 날았다. 그 잠깐이 끝나자마자 땅에 몸을 던졌고, 두 손이 땅에 닿았다. 다행히 왼쪽 어깻죽지로 누웠던 것 같다. 쪽팔림은 둘째치고, 옷에 구멍이 났을까봐 걱정됐다. 예전에도 이렇게 넘어져서 바지에 구멍이 났었지. 구석구석 살펴봐도, 다행히 미끄러지듯 넘어지는 바람에 구멍은 나지 않았나보다. 생각보다 아프지 않아서 얼른 툭툭 털고 일어났다. 그렇게 달려간 곳에서 아무렇지 않은 듯 빵 두 개를 샀다.


#7

귤 사고 빵 사고 물과 음료수를 사고, 또 비스킷과 감자칩을 샀다. 은근히 많아졌다. 이것들은 선배단원 두 명, 오늘 길을 떠나는 그 둘에게 줄 것이다. 이곳 탈라스에서 장장 여섯 시간 동안 차를 타고 달려가면, 수도 비쉬켁이 나온다. 오늘 그들은 저녁이 되어서야 비쉬켁에 도착할 것이다. 그 여섯 시간은, 며칠 동안 짐 싸느라~ 작별인사 하느라~ 피곤에 지쳤을 그들에게 잠깐 동안 휴식시간이 될 터이다. 산을 넘고 또 넘고, 꼬불꼬불 온갖 산길을 헤치고, 고도 3200미터가 넘는 까마득한 고개를 넘어서, 그렇게 겨우 도착한 곳이 고작 이 나라를 벗어나지 못한 수도 비쉬켁이란 곳이다. 그리고나서 또 며칠이 지나 비로소 이 나라를 떠날 수 있을 것이다.


#8

결국 선배 단원들이 떠나면서 나는 혼자 남았다. 어차피 기대해선 안 될 선물같은 분들이었지만, 그 두 (친구같고 동생같은) 분들과 함께 한 날들이 정말 좋았다. 처음 도착하자마자 안그래도 황량한 탈라스, 게다가 겨울의 참을 수 없는 쓸쓸한 풍경에 입을 꼬매버린 듯 말을 잇지 못했다. 유일하게 속으로 떠오른 말은 바로 'desperate', 이상하게 두서없이 이 단어부터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토록 충격적인 이곳 탈라스의 첫인상에 어찌 적응할까 막막하기만 했지만, 그와중에 그나마, 따뜻한 두 선배단원들 덕분에 마음을 다질 수 있었다. 일부러 나 때문인 듯, 매일 오후 세 시에 한 선배단원 집에 모이기로 했다. '스터디'를 빙자한 두 시간 남짓한 동안 커피를 마시고 책을 읽었다. 다들 빠듯하게 할 일이 있을 땐 공부도 열심히 했지만, 가끔 요리도 해 먹고 이야기도 꽃피웠다. 키르기즈 사람들이랑 있었던 유별난 얘기, 이전에 계셨던 선임단원 얘기, 이곳에서 제일가는 맛집 먹거리 얘기, 각자 자신의 학교에 관한 인수인계 이야기 등등... 나는 학교 수업을 마치고 아무리 피곤해도, 한 시간 만이라도 꼭 이 집에 들렀다. 매일 오후에 이들과 함께할 시간을 손꼽아 기다렸던 것 같다. 아예 열쇠까지 주셔서 어떤 때에는 두 명 다 늦고 나 혼자 차를 마시며 그들을 기다리기도 했다. 그렇게 한 달 하고도 열흘이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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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마침내 차가 도착했다. 먼저 차를 타고 데리러 온 또다른 선배단원은 눈이 퉁퉁 부어있었다. 나머지 트렁크와 배낭 짐을 싣고 두 단원이 모두 차에 탔다. 인사하려 손을 흔들기도 전에 차는 떠났다. 그리고 남겨진 사람들 모두 떠났다. 솔직히 내가 느끼기엔 모두들 너무 훌쩍 떠나버렸다. 나 홀로 어디로 가야하지 잠시 멍해졌다가, 가야할 곳이 있다는 걸 비로소 깨닫고 발걸음을 옮겼다. 학교 방향으로 걸어가면서, 한걸음 한걸음 떼면서, 그제서야 나는 아까 넘어졌던 곳이 욱신욱신거렸다. 시간은 제멋대로 흘러가는 듯 했다.


#10

귤을 바꿔오자마자 내가 넘어졌단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귤이 다 터져버렸단 것도. 가게 주인에게, 그보단 아까 심각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던 순진한 가게 점원에게 미안해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이 사실을 현지어로 설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요, 모든 힘이 빠져버린 듯 했다. 비로소 인지는 했지만 상황을 되돌리고 싶지 않다. 힘도 없고 의지도 없었다.


#11

"오늘 왜 이렇게 슬픈 표정이니?" 항상 인사말처럼 '기분 좀 어때(칸다이시스)?'라고 물어보시던 선생님들. 그런데 오늘은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벌써 두 명이, 왜 슬픈 얼굴인지 물어보셨다. '그러게요.' 내 얼굴이 티를 다 내고 다닌다. 또다시 패딩을 옷걸이에 걸어놓으며 그 옆에 거울을 보았다. 쓸데없이 솔직한 얼굴탓 하려고 바라보았더니, 정말이지 오늘은 슬프고 힘이 없어보인다. "친구들이 떠났어요." 이렇게 말하면서 슥 웃어보였는데, 내가 애써 웃음짓는 만큼, 그와 동시에 어깨가 깊게 욱신거리는 것이었다.


#12

자꾸만 터진 귤이 생각났다. 넘어지면서 이미 귤은 터져버렸지만, 나는 엉뚱한 곳에다 화풀이를 했다. 나도 마찬가지다. 매일 두 선배단원들과 주변 지인들과 작별 만찬을 하느라 맛있는 밥 먹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서도, 집에만 돌아오면 우울해서 마음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요즘 우울했던 이유는 아마 이 예정된 이별 때문인 것 같다. 내 마음은 이미 터져있었다.

#13

사실 아직 완전히 헤어진 건 아니다. 나는 며칠 뒤 수도 비쉬켁에 가서 그 두 분을 진짜진짜 배웅할 예정이다. 그렇게 또 작별인사를 하고, 또 이별을 경험해야 한다. 그렇지만 아마, 다가올 이별보다 오늘 이별의 순간이 더 슬플 듯 하다. 내가 홀로 떠나온 것은 그리 슬프지 않은데, 내 의지와 상관없이 떠나가는 이들을 보는 것은 참으로 슬프단 말이다. 그냥 바라만 보고 서 있어야 하는 무기력함이, 그들이 떠난 빈 자리를 볼 수 밖에 없는 상황 자체가 견딜 수가 없다. 우는 것도 내 맘대로 안 되는지 울고싶어도 눈물이 나오지 않는 지금이 더 울고싶은 심정이다.


#14

내 속도 모르고, 내일은 또 온다. 영문도 모르고 바꿔 온 새 귤처럼, 영문도 모르고 쨍하니 아침 해는 멀쩡하게 뜰 것이다. 시간은 제멋대로라지만, 이처럼 당연히 기대할 수 있는 게 있을까? 나는 내일 아침을 속절없이 그러나 다행스러운 마음으로 기다려야겠다. 어깨는 아직도 아프고 무릎도 욱신거리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조용한 밤, 오늘따라 유난히 노란 등 불빛. 새삼 모든 것이, 오늘따라 유난히 예민하게 다가오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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