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별별 Jun 21. 2017

나를 빤히 바라보는 것을 느꼈다

어느 여름날, 한 소년에게


한창 꽃피는 나무를 보면서 조금 아쉬운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예쁜 몸짓으로 사랑을 갈구하는 꽃이 되었으면, 나도 그렇게 몸 안에서 피어나는 열정을 아름다게 표현할 수 있었으면. 여전히 나는 스스로 아름다워지는 법을 모르는 듯 하며, 스스로 사랑하는 법을 모르는 것 같다. 그건 누군가의 마음을 받아들일 때 그토록 서투를 수가 없어 보이는 나 자신을 발견할 때다.


이번 여름 휴가에서 사뭇 기억에 남는 소년이 있다. 덩치가 큰 아이였는데 그래서 처음에는 그렇게 어린 아이인줄 몰랐다. 처음 자기 소개를 하는 시간에 얼굴이 빨개져서 아무 말도 못하고 겨우 이름만 말했던 아이. 그땐 그저 수줍음이 많은 친구인가보다 싶었다.


언제부턴가 그 아이가 눈에 밟힌 것은 알게모르게 항상 내 곁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다. 메디테이션 또는 아트클래스 강의시간, 마음대로 방석을 깔고 자리를 잡고 앉아 있을때면 언제나 그 아이가 내 옆에 있었다. 함께 댄스 연습을 할 때에도 내 차례가 돌아오기까지 뒤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으면 그 아이는 내 옆에 와서 가만히 앉아있곤 했다. 창밖을 바라보고 있으면 갑자기 옆 창문에서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나를 바라본다던지, 다른 누군가와 얘기하고 있으면 저 멀리서 나를 응시하고 있는 그 소년이 있었다. 


소년은 집요한 구석이 있었다. 

말 없이 그냥 바라만 보는데 내가 바라보지 않으려고 애를 써도 도저히 바라보지 않을 수가 없는 그런 시선으로 계속 나를 바라보았다. 솔직히 처음에는 그 시선이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자꾸 자리를 피하고 외면했던 것 같다. 내가 유일한 동양 사람이라 신기해서 쳐다보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애정어린 시선이 분명했다. 졸졸졸 따라다니며 그림자처럼 내 옆에 따라붙는 그 소년이 점점 기특해졌다. 조금씩 그 아이의 시선에 익숙해지려고 노력했다. 마침내 나도 용기를 내서 고개를 돌려 그 아이를 바라보고 웃어주기도 했다.


언젠가 둘이서 방석 정리를 하고 야외 수업장소로 옮겨놓는 잠깐의 시간이 있었는데 처음으로 말을 걸었다. 

ㅡ 이름이 뭐니?

ㅡ 이고르예요. 

ㅡ 몇 살이니?

ㅡ 네?? 

ㅡ 몇, 살, 이니?

ㅡ 아, 아! 열 세 살이에요. 


소년은 러시아 사람이었다. 영어를 조금은 알아들었지만 기초적인 대화도 잘 통하지 않았다. 나는 러시아 말을 못하고 그 아이는 한국어는커녕 영어도 못하고. 결국 그냥 웃는 수밖에. 놀라운 사실은 그 소년이 열 세 살이라는 어린 나이였다는 것이다. 키가 하도 커서 열 대여섯 살은 되는 되는 줄 알았다. 


솔직히 말하면 그 아이가 계속 생각난다. 정확히 말하면 나를 바라봐주던 그 아이의 모습이, 내가 못이기는 척 바라봐주면 슬그머니 빨개지며 미소를 짓던 그 얼굴이. 우리는 말도 통하지 않았고 그저 바라만 보았을 뿐이다. 하지만 나는 빤히 바라보는 그 아이의 시선을 지금도 느낄 수 있다.


그 아이는 어느날 조그마한 돌멩이를 선물로 줬다. 아주 하얀 돌이었다. 깨끗한 모래사장 어딘가에서 주워왔을 그 돌이 이젠 하나 뿐인 호수의 추억으로 남게 되었다. 돌멩이를 보면 그때의 노을진 풍경이 되살아나고 땀이 송글송글 맺힌 얼굴로 이걸 건네주던 아이가 생각난다. 그 아이는 왜 그렇게 나를 따라다녔을까, 왜 그렇게 웃어보였을까.


어쩌면 나는 그 아이를 좋아하게 되었을지 모른다. 잠깐잠깐 설렜고 조금씩조금씩 그 소년이 신경쓰였다. 하지만 그 사실을 인정하기란 매우 겸연쩍다. 그 소년은 매우 어리고 우리는 너무 짧은 순간을 함께했기 때문이다. 하얀 돌을 선물로 받았기에 답례로 나는 그 아이에게 엽서를 한 장 남겼다. 


고마워.

한글로 쓰여진 짧은 엽서. 나는 꼭 고맙다는 그 말을 해주고 싶었다. 우린 그저 바라만 보았지만, 우린 그저 수줍어 했지만, 우린 그저... 어느 여름 날 호수의 공기를 함께 했을 뿐이지만.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가 함께했다는 사실, 그것은 사랑일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