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별별 Jan 02. 2018

두 편의 시

그와 대화를 이어나가는 건 어려웠다. 그의 답장을 기다리는 게 두려워 나는 애써 문장을 닫았고 그러면서도 그의 답을 애타게 기다렸다. 그에게 새해 인사를 보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간단한 인사말이었지만 그는 이틀 만에 답장을 보냈다. 가끔 매사에 진지한 그의 태도가 답답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그는 다시금 기대하게 만드는 동시에 또다시 포기하게 만들었다. 


그는 두 편의 시를 동봉했다. 어쩌면 나도 이런 시를 쓸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든다고 했다. 시의 화자는 나를 떠올리게 한다. 정말 내가 쓴 것처럼 많은 부분이 곳곳에 공감을 이루며 반짝이고 있었다. 

정말 먼 곳
ㅡ 박은지

멀다를 비싸다로 이해하곤 했다 
우리의 능력이 허락하는 만큼 최대한 
먼 곳으로 떠나기도 했지만 
정말 먼 곳은 상상도 어려웠다 

그 절벽은 매일 허물어지고 있어서 
언제 사라질지 몰라 빨리 가봐야 해 

정말 먼 곳은 매일 허물어지고 있었다 
돌이 떨어지고 흙이 바스러지고 
뿌리는 튀어나오고 견디지 못한 풀들은 
툭 툭 바다로 떨어지고 
매일 무언가 사라지는 소리는 
파도에 파묻혀 들리지 않을 거야 

정말 먼 곳을 상상하면 불안해졌다 
우리가 상상을 잘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의 상상이 
맞았는지 틀렸는지 알 수 없었고 
거짓에 가까워지는 것만 같았다 

정말 먼 곳을 상상하는 사이 정말 가까운 곳은 
매일 넘어지고 있었다 정말 가까운 곳은 
상상을 벗어났다 우리는 
돌부리에 걸리고 흙을 잃었으며 뿌리를 의심했다
견디는 일은 떨어지는 일이었다 
떨어지는 소리는 너무 작아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는 정말 먼 곳을 상상하며 정말 가까운 곳에 서 있었다
그래야 절벽에서 떨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2018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2018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


그가 시를 읽는 모습을 상상한다.
시에서 비추는 내 모습을 상상하는 그를 상상한다.


나는 시와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연히 다시금 시를 마주하고보니, 뿌리칠 수 없는 유혹같은 느낌이 든다. 그는 내가 시를 썼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의 바람은 곧 나의 것이 되었다. 언젠가 시를 쓰리라 마음먹었다.


나는 어떤 사람일까, 문득 반성 아닌 반성이 들었다. 그를 생각한다는 건 한낱 관심의 연장선이었던 것 뿐일까. 그를 단순히 연애 상대로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그라는 사람을 낭비하는 것 같다는 생각에, 약간의 죄책감이 들었다. 왜냐하면 그는 나를 어떤 인격체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생각하는 사람, 주변의 풍경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 마음을 부풀려 단어 하나하나에 압축하는 시를 쓸 줄 아는 사람. 나는 그에게 그런 존재일 것만 같았다. 서로를 다루는 방식이 나는 그에게 훨씬 못미치는 게 분명했다. 나는 그에게 존재하는 사람이었지만 나는 그를 소비하고만 있었다.


언젠가 시를 쓰면, 언젠가 그와 시를 나누리라. 그간의 사정을 글로 대신하여 말하지 않고 말하리라. 그는 앞에 앉아있는 내 얼굴은 보지 않아도, 내 이야기는 듣지 않아도. 아마 내 시는 읽어줄 것이다. 두 편의 시를 계속 곱씹으면서 나는 그와 조우한다. 또다른 내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를 빤히 바라보는 것을 느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