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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별 Jan 19. 2019

하루의 끝

백수의 퇴근길

 하루가 닫혔다, 책을 덮었다. 창밖 하늘은 연보랏빛 회색으로 물들고 스산한 저녁이 다가오고 있었다. 가방을 싸고 방석과 패딩을 챙겨 조심스레 의자들 사이를 헤쳐 나온다. 아직도 후끈한 도서관의 열기는 햇볕에 익은 아스팔트 길을 디디는 것 마냥 이곳을 벗어나는 발걸음을 재촉하게 만들었다.


 건물 밖을 나올 땐 언제나 각오를 해야 한다. 찬 기운이 온몸으로 파고들어 목도리와 주머니 속으로 움츠려 들곤 한다. 하지만 몇 분만 걸으면 금세 몸이 데워질 것이다. 이어폰을 꺼내며 오늘의 플레이리스트를 재생한다.  


 아직도 꿈꾸듯 하루의 잔상이 남아있다. 아스라이 뭉쳐있는 어깨는 기계적으로 토익 기출문제를 마킹하던 시간을 짐작하지만 어느새 까마득한 과거가 되어버린 듯하다. 120분 동안 200문제를 풀고 다시 75분 동안 100문제를 더 풀었다. 틀린 문제를 맞혀보며 넘겨버린 책장은 모두 흘러가버렸고 필기는 모두 날아가 버렸다. 머릿속, 체온이 기억하는 이 잔상은 오늘 모두 잊기로 한다. 조금만, 조금만 더 볼륨을 높여 본다.


 이제부터는 하루 중 가장 호사스러운 시간ㅡ백수의 퇴근길. 걷고 걸어서 우리 집에 닿을 때까지. 음악이 들리는 모든 풍경은 눈앞에 뮤비처럼 펼쳐진다. 속삭이듯 들려오는 가사와 함께라면 모든 게 그럴듯하게 보일 지경이지만, 실로 그 풍경은 거짓 없이 ‘낭만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길은 옛날에 실제로 기차가 다녔던 폐철길이다. 1970년대를 풍미했던 마산항, 무시로 화물을 싣고 다니던 철길의 영화를 기억하는 건 녹슨 흔적뿐이지만, 그 철길은 산책로를 만들면서 사람의 흔적을 덧입게 됐다. 나는 그 길을 간다. 철길 해안도로를 따라 걷다 그 앞 아파트 단지를 통과하고 마산 민주항쟁 기념비를 다리로 건너 초등학교를 지나 신호등에서 멈춰 서곤 한다. 건너편 목욕탕 앞 붕어빵은 항상 사 먹어보고 싶지만 초록불이 켜졌단 핑계로 그냥 지나치고 만다.



 마침내 시장이 가까워오면 가끔 마주치는 사람들이 있다. 거친 부츠화를 끌고 다니며 서넛 무리 지어 퇴근하는 일용직 노동자 아저씨들. 스쳐 지나갈 때면 짙은 담배냄새와 함께 약간의 미련이 남는다. 어떤 동질감 같은 것이, 하루의 무게를 짊어졌다가 털어버리는 그 심정 같은 것이 아마도 꼭 이해해줄 수 있을 것만 같아 아는 체하고 싶은 충동이 든다.


 철길을 벗어나 사잇길 시장으로 들어가면 마침내 집에 도착한다. 이어폰을 뽑으며 뮤비를 멈춘다.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던 모든 순간들, 걷고 걸으며 닿은 오늘 하루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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