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돌아온 어른 입양아, 제인 또는 경아의 한국

제인 정 트렌카 '덧없는 환영들'

by 별별


알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 그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책 읽기’는 바로 그 시작이다. 책을 만지고 활자를 읽고 단어와 문장과 글이 나의 언어 사고체계에 들어와 인지할 수 있는 것. 과거에 책이 쓰인 시기에 작가의 심정, 기억을 더듬어 작가의 글이 나오기까지 그의 인생이 있었고 멀리서 이제 와서 그 글을 읽는 나는 책이란 다리를 건너 머나먼 시간과 공간을 감히 상상해 보는 것. 이 모든 것이 ‘노력한다’는 말속에 포함되어 있다. 이해할 수 없지만 이해해보려 최선을 다하는 노력은 책을 읽는 것에서 나아가 그것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라 믿는다. 섣부른 말하기일 수도 있지만, 아무런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면 세상의 어느 것도 어느 누구도 그 누구에게도 ‘꽃’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섣부른 시도, 책을 읽고 무언가 말하려고 하는 것에도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이라 믿으며 책 이야기를 해 보려 한다.


한 편의 피아노곡이란 형식


나는 이 책을 두 번 세 번 읽었다. 사실 책의 미로 속에 갇혀버려 자꾸 왔던 길을 되돌아왔다고 말하는 것이 더 솔직하다. 몇 번이고 이 책을 다시 읽으며 이야기가 만든 형식, 또는 형식이 만들어놓은 이야기 속을 헤맸다. 날것 그대로였지만 매우 정교한 미로였다.


총 1장부터 9장까지, 이 책은 곧 한 편의 피아노곡이다. 작가는 이 글을 씀으로써 한 편의 곡을 완성한 것이다.

“피아니스트는 작곡가가 아니라 해석가다.... 그러나 나는 결코 훌륭한 해석가가 되지 못했고 결코 여유로운 연주가가 되지 못했다. (164쪽)”

그러나 피아니스트로서 자신을 정의했던 작가는 이번만큼은 작곡가였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어떤 식으로 연주할 것인지 정의하고 있었다. 적어도 이 책에서만큼은 독자는 그가 내린 지시를 따라야만 했다. 책을 읽는 독자는 이 글을 작가의 의도대로 연주하는 연주가이자 또한 글을 감상하는 청취자가 되었다.


음악 용어를 잘 알지 못하는 나는 그래서 좀 어려움을 느낀 듯하다. 작가가 마련해 놓은 작은 문, 소제목을 어려운 관문을 통과하듯 매번 고쳐 확인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 이탈리아 용어의 어감이 낯선 것이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곡을 연주하려 할 때 -글을 감상하려 할 때- 작가의 지시 그대로 행하려는 마음의 준비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아예 모르고 안을 들어가는 것과 드레스코드를 알고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긴장을 한 뒤 들어가는 것의 차이였다.


각각의 장에서는 어떤 빠르기를 말하고 있었다.

렌타멘테(느리게), 안단테(느리게), 알레그레토(조금 빠르게), 아니마토(생기있게), 몰토 지오코소(매우 즐겁게), 콘 엘레간차(우아하게), 피토레스코(회화적으로), 코모도(편하게), 알레그레토 트란퀼로(조금 빠르고 조용하게), 리디쿨로사멘테(우스꽝스럽게), 콘 비바치타(생기 있게), 아사이 모데라토(딱 보통 빠르기로), 알레그레토(조금 빠르게), 페로체(거칠게), 인퀴에토(불안하게), 돌렌테(구슬프게), 포에티코(시적으로), 콘 우나 돌체 렌테차(부드럽고 느리게), 프레스토 아지타티시모 에 몰토 아첸투아토(빠르고 격렬하게 강한 강세를 주어가며), 코다(종결부), 렌토 이레알멘테(아주 느리게 꿈같이)

어떤 장에서는 어느 곡을 연주하기 위한 소제목으로 나눠지기도 한다.

- 변신 연습곡 제1번, 제2번, 제3번, 입양인의 독주를 위한 우연성의 음악, 꿈 레퍼토리.
- 가면 무도곡 제1번, 제3번, 제3번, 제4번, 스토커가 성적으로 위험하다는 판결의 명세서, 제5번.


나는 악보를 읽는 충실한 연주자가 되기 위해 노력했고, 때론 느리게 때론 편하게, 때론 거칠게 때론 우아하게 이 책을 읽어냈다.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작가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 책을 읽는 과정은 그 자체로도 물리적으로 힘든 과정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책이 주는 내용이 ‘불안하게 구슬프게 격렬하게’ 나를 괴롭혔음을 고백해야만 하겠다.


존재와 인간성의 상관관계


“우리는 모두 인간이다. 우린 그냥 사람이다. 아무렴, 난 그냥 한 사람이고 싶었다. 그런데도 나는 내 모든 삶을 내 인간성을 되찾는 데 썼다. (107쪽)”

이 문장은 작가의 말 중에 유독 가슴 아프게 와 닿는 말이었다. 물성으로는 인간이었음에도 작가는 왜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해 그토록 온 생을 다 바쳐야 했을까. 이 말은 이혼 이야기의 결말에 한 것이었지만 그녀의 소리 없는 절규는 당연한 듯 보이는 것들을 당연히 누릴 수 없는 그녀의 처지를 한꺼번에 압축해서 말해주는 듯했다.


그녀가 한국에 돌아오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바로 이혼이었다. 그 전에도 다섯 번이나 심심찮게 한국에 방문한 적이 있었지만 5년 간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나서 몇 안 되는 짐을 들고 한국에 비로소 정착했다. (사실 정착이라고 하긴 부족한 감이 있지만.) 분명히 상대방을 사랑했고 사랑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자신이 바라보는 곳을 향한 집착을 나을 뿐이었다. 하지만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서로의 위치가 전혀 달라서인지는 아닌지는 생각해볼 문제다. 그 위치, 정체성은 아무리 해도 범접할 수 없는 자기 본연의 것이었고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 그 사람은 본래 그렇다는 것으로만 타인으로부터 이해받을 수 있는 것이었다. 결혼이라는 관계 맺기에, 또 이혼이라는 관계 단절을 겪으면서 더욱더 극단적인 홀로 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런데 사실 스스로 인간임을 실감하고 자각하려는 노력은 우리와 동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녀를 무작정 동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다. 그녀에게는 좀 더 직접적인 계기가 있었기 때문에 더 빨리 분명하게 인간성의 부재를 알 수 있었을 뿐, 우리 또한 스스로 결핍되어 있음을 자각하지 못하는 것이 분명하다. 입양아의 처지 외에도 이혼이라는 사건이 그녀의 삶 속에서 인간성을 회복하려는 생각을 촉진했을 뿐이다.


입양의 의미에 대한 완벽한 오해


내가 이 책을 읽고 놀란 것은 입양이 사회적으로 어떤 기능을 하는 것과는 별개로 한 개인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완벽히 다른 관점에서 부정적이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입양이 한 사람의 존재를 완전히, 돌이킬 수 없게 지워버리는 것임을 그들은 몰랐다. 우리의 입양은 너무도 합법적인 절차로 우리의 언어, 우리의 문화, 우리의 가족, 우리의 이름, 우리의 생일, 우리의 시민권, 우리의 정체성을 빼앗는 것이었다. 그러고도 세상은 입양을 자비롭고 도덕적인 행위로 간주했다. (124쪽)”


나에게 ‘입양’이란 어떤 의미였던가. 나는 법학을 전공했고 입양을 계약의 일환으로 배웠다. 나는 훗날 한 아이의 어머니가 될 것인데, 만약 아이를 갖지 못하는 상황이 되더라도 ‘입양을 할 수 있으니까’라는 생각으로 입양을 내가 가질 수 있는 최후의 수단으로 보았다. 내가 입양을 할 수도 있다는 말을 하면 ‘어떻게 입양을 해’라는 주위의 말들이 오갔고, 입양을 함으로써 내 아이와 다른 아이가 다르지 않고 나는 동일한 사랑을 베풀 수 있음을 주위에 증명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니까 결국 나는 입양을 할 수 있는 자로서, 내게 ‘입양’은 선택의 문제였고 도덕을 증명하려는 도구에 불과했다.


그러나 작가는 내 생각이 완벽히 틀렸다고 말한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입양아의 입장에서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입양아와 고아는 다르다. 하지만 그녀가 느끼기에 입양아는 고아와 다를 바 없다. 게다가 그녀는 서류상 고아와 다름없는 신분으로 위조되었다. 그녀는 고아는 끊임없이 채울 수 없는 허기를 느낀다고 말한다.


내가 가진 입양아의 엄마에 대한 환상도 마찬가지다. 많은 한국의 아줌마들이 그녀를 동정하며 “엄마라고 불러도 돼.”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거부한다.

“마치 아무나 다른 사람 아이를 그냥 뺏어도 된다는 듯, 마치 누구나 엄마가 되고 싶으면 엄마가 될 수 있다는 듯이 말한다. 그러나 난 이제 입양은 사절이다. 마음이 참 따뜻하시네요 라고 말하지 않는다. 당신은 내 엄마가 아니잖아요. (229쪽)”


언제든 입양아의 엄마가 될 수 있음을 기대했던 나였기에 그녀의 말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입양이란 미명으로 한 아이의 존재를 부정하고 인정하는 것을 합법적인 절차이며 도덕적으로 선하다고 믿었던 것은 아닌지, 너무나 쉽게 한 아이의 인생을 설계할 수 있다고 믿은 것은 아닌지, 아니 그 아이의 입장에서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솔직히 말하지 못한 것은 아닌지. 그녀는 나의 무지를 완벽히 간파했고 입양이 사회적인 시스템과 절차로 나아갈 때면 무지를 넘어선 한 개인에 대한 폭력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말해줬다. 나는 선의의 제삼자인 것인지, 시스템 속의 일원으로서 공범인 것은 아닌지 스스로 혼란을 이길 수 없었다.


내가 보는 한국이 다가 아니었음을


작가의 시각은 또한 내가 한국을 바라보는 시각을 다르게 만들었다. 그녀가 묘사한 연희동, 신촌, 이촌동, 이태원 등은 모두 내가 살기도 하고 틈만 나면 자주 머무르던 곳이다. 하지만 그녀의 글을 읽으면서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우리의 발걸음은 동일한 곳을 디뎠으나 우리의 시선은 전혀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대학교 뒷문 근처 하숙집과 꽤 근사한 옛 주거지로만 알고 있었던 연희동에 입양아가 그렇게 많이 사는 줄은 꿈에도 알지 못했고, 내겐 붐비고 복잡한 신촌 그랜드마트가 그녀가 편안함을 느낄 정도로 특별한 곳인 줄 알지 못했다. 이촌동의 거대한 아파트 단지는 그녀가 도망치고 싶었을 정도로 위화감을 들게 했지만 나에겐 그저 한강 주변의 아파트 단지에 지나지 않았다. 이태원은 핫한 맛집들이 많은, 근사하고 이국적인 동네로 모험을 떠나듯 구경하던 동네였지만 그녀에게는 한국계 미국인, 또는 동양인 여자라는 정체성을 혼동하게 만드는 다른 외국인들이 득실득실한 곳이었다.


“빠리에 산다고 다 빠리 사람은 아니다. -(러시아에선 유럽인, 유럽에선 러시아인이었던) 쎄르게이 쁘로꼬피예프. (119쪽)”

한국에 살지만 그녀는 ‘한국 사람’은 아니었다. 두 언어를 하는 두 명의 사람이었다. 영어를 잘하는 그녀와 한국어를 못 하는 그녀. 명예 백인으로서 영어를 쓰고 영어를 가르치며 한국에서 나름 우월한 지위를 차지할 수 있지만, 또 한편으론 어눌한 한국어로 외국인 취급을 받고 한국어를 잘하는 외국인에게 열등감을 느꼈다. 어떤 언어를 사용하느냐는 한국에서 그녀의 지위를 결정지을 수 있는 것이었다. 두 개의 언어와 두 명의 정체성에서 그녀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한다. 마녀 같은 백인성의 유혹에서 벗어나려고 하면서도, 학생들에게 한국어로 말하려는 것을 회피하려는 자신이 ‘구태한 변명’을 하고 있다고 스스로 말한다.


“영어를 잘해서 부러워요. 당신은 한국어 할 수 있어요? 당신은 한국인이니까 한국어를 잘할 수 있을 거예요.” 내가 만약 그녀를 만났더라면, 나는 그녀 주변의 무수한 한국인들이 그녀에게 하는 말을 똑같이 할 수 있는 평범한 한국인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결국 나는 그녀를 더 혼란스럽게 할 것이다. 나는 명백한 한국인이란 사실이 그녀를 더 외롭게 만들 것이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한국에는 아무도 모르게 서로를 알아보는 입양아들 그들만의 커뮤니티가 있었다. 그들은 그 속에서 서로 비슷한 처지에서 삶의 일부를 공유했으며 부모를 찾은 입양아, 그렇지 않은 입양아, 지속적인 관계를 맺는 입양아 등 서로 다른 처지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노력하며 살고 있었다.


그녀는 입양아 남자 친구들을 사귀면서 그들의 모습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좀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다.

“사랑은 헛되고 세상은 무심하고 자유에는 책임이 뒤따른다, 이 세 가지를 도미니끄의 삶을 지켜보며 배웠다.... 어떤 식으로든 자기 삶을 재해석해서 산산이 흩어져 있는 자기 존재를, 그 자신이 느끼기에 자신의 싸움에 걸맞은 모습으로 다시 하나로 끌어모으기를 바란다. (246쪽)”

살아가는 게 인생의 목표는 아니라지만 그들의 삶은 그 자체로 한국을 이해하기 위해, 부모를 이해하기 위해, 결국 자기 자신의 삶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었다.


작가의 고백이자 나의 실패한 연주


작가는 고백했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자신은 좋은 피아니스트가 될 수 없었다고.

“다른 사람의 음악, 다른 사람의 말, 다른 사람의 행동을 그럴듯하게 연주하고 연기할 수 있을 만큼 오랜 시간 나 자신을 잊을 수가 없었다. 나는 다른 사람이 될 수 없었다. (164쪽)”

이 책을 다 읽은 나 또한 그의 말에 동의한다. 작가는 그녀의 삶을 훌륭한 곡으로 풀어냈지만, 심지어 친절하게 어떻게 연주해야 할지 각 장마다 빠르기를 일일이 안내해 줬지만 나는 완벽히 작가의 의도대로 곡을 연주할 수 없었다. 나는 결코 작가가 의도한 바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결코 그녀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내가 이 책을 읽기 전과 후가 분명히 다르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나는 다른 세계를 이해하려 노력했고 그 노력의 의미는 작가뿐만이 아닌 다른 입양아, 한국에 존재할 이방인, 또 어쩌면 내가 겪을 낯선 곳에서의 이방인이라는 자각에 모두 기여할 것이므로 헛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계기가 되어 주었음에, 비록 작가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연주자가 되진 못해도 나를 연주자로 만들어준 작가에게 감사함을 표현하고 싶다.


책을 덮었지만 그 여운은 내게 반성과 깨달음이라는 상흔을 남겼다. 앞으로 훗날 모든 시선에 그 상흔이 함께할 것임을, 그리고 모든 마음에 여운을 남길 것임을 또한 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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