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코패스 살인마들의 잔혹한 행위를 떠올려보면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고 주장한 ‘성선설’은 가당찮다.
한 연쇄 살인범은 오로지 자신의 쾌감을 위해 20명이 넘는 사람들을 무참히 살해하고, 그 사체를 토막 내기 위해 해부학까지 공부했다고 한다. 냉혹하고 주도면밀하기 이를 데 없는 그의 행위는 인간의 그것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와 같은 부류를 ‘괴물’로 치부해 버리고, 인간 세상에서는 언제나 ‘선’이 ‘악’을 이긴다는 근거 없는 믿음에 안도한다. 하지만 우리가 정작 경계해야 할 것은 그런 ‘괴물’이 아니다. 선한 이웃의 얼굴로 일상 속에 스며있는, 어쩌면 내 안에도 깃들어 있을지 모를 평범한 인간의 ‘악’한 본성이 나는 더 두렵다. 영화를 보는 내내 ‘창복’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던 이유다.
창복과 '악의 평범성'
평소에 그는 트럭에 계란을 싣고 다니며 팔지만 일반인은 상상도 못 할 부업을 겸하고 있다. 그건 바로 범죄 조직이 저지른 살해 현장을 은밀하게 청소하는 일이다. 작업 도중 피가 옷에 묻지 않도록 노란색 어린이용 우비를 입고, 하늘색 바탕에 분홍색 꽃무늬가 도드라지는 샤워 캡을 쓴다. 어딘지 모자라고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모습이지만 일처리만큼은 완벽하고 깔끔하다. 근면 성실할 뿐만 아니라 예의 바르고, 겸손하고, 신앙심마저 깊다. 살해당한 사체를 수습하고 암매장하는 와중에도 고인에 대한 예를 갖추는 일을 잊지 않는다.
그런 그가 하는 일이 단지 사후 처리만이 아니라는 사실이 당혹스럽다. 몽둥이로 때리기 좋은 적당한 높이에 살아 있는 사람을 매달아 놓고, 그 아래에는 커다란 비닐을 깔아 놓는다. 보다 편리(?)하고 쾌적(?)하게 사람을 죽일 수 있도록 사전 작업에 심혈을 기울인다. 함께 일을 다니는 태인에게 ‘남의 것을 탐하면 불구덩이에 떨어진다’는 성경의 한 구절을 읊어주고, ‘주어진 일에 감사해야지 허튼 일에 관심을 가지면 분명 큰 사달이 난다’며 삶의 교훈을 전하기도 한다. 자신의 죄에 대한 심적 부담을 덜기 위해 그러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자신이 깔아 놓은 비닐 위에 피를 뿌리며 사람이 죽어갈 동안 천연덕스럽게 라면을 끓여 먹는 모습을 보면 양심의 가책이라고는 없어 보인다.
“저는 남을 해치는 것엔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제가 관심이 있는 건 맡은 일을 잘 해내는 것뿐입니다.”
창복이 내뱉었을 법한 이 말은 창복의 대사가 아니다.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이 법정에서 했던 말이다. 자신이 개발한 ‘가스차가 달린 열차’로 인해 수많은 유대인이 죽음을 맞았지만 아이히만은 끝내 그 누구에게도 용서를 구하지 않았다. 자신의 죄를 인정할 수 없으며 만일 나치의 월급을 받으면서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양심의 가책을 받았을 것이라고 항변했다.
당시 아이히만의 재판을 참관한 유대인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그가 유죄인 것은 타인의 고통을 헤아릴 줄 모르는 ‘생각의 무능’ 때문이라는 말을 남겼다. 평범한 사람들의 생각 없음이 악의 근원이 될 수 있다는 의미의 ‘악의 평범성’이란 개념이 제시된 배경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창복은 단순히 조폭의 하수인이 아니라 악의 근원, 그 자체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입이 테이프로 봉해진 채 절박한 시선을 보내는 ‘작업 대상’을 줄에 매달며 창복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시신을 수습하며 그는 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하룻밤만 맡기로 했던 초희를 되돌려 보낼 수 없게 되자 창복은 몸값 협상에 직접 뛰어든다. 우여곡절 끝에 몸값이 든 가방을 손에 넣은 그는 잡힐 것이 두려워 허둥지둥 도망을 치다가 ‘허튼 일에 관심을 가지면 분명 큰 사달이 난다’는 자신의 말대로 실로 어이없는 죽음을 맞는다. 그가 그토록 두려움에 떨었던 이유는 자신이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지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생각의 무능으로 인한 '악의 평범성'을 넘어 본성적으로 악함을 타고났는지도 모른다.
몸값을 받지 못하면 초희를 장기매매 업자에게 보내겠다는 유괴범의 말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며 창복이 스스로를 속이는 핑곗거리가 됐을 것이다. 그 순간 그는 ‘생각의 무능’과 ‘생존의 문제’를 넘어 스스로 ‘악’을 선택한다. 그런 그를 실족사로 처리한 결말은, 아직은 실낱처럼 남아있는 ‘선’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차마 저버릴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초희의 몸값이 든 가방을 움켜쥔 창복, 갈림길에서 '악'을 선택하다
장기 매매 업자에게 초희를 데려간 태인, 갈림길에서 '선'의 방향으로 한 발을 내딛다.
태인과 '성선설'
창복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는 ‘악’의 세계를 경험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본성이 ‘선’과 ‘악’, 어느 쪽에 더 가까운지 판단하는 것은 쉽지 않다. 아니, 어쩌면 아직 진화가 끝나지 않은 ‘고릴라’와 같은 그를 두고서 인간의 본성을 논하는 것은 무리일지도 모른다.
태인의 역을 맡은 유아인 배우는 감독이 주문한 ‘영역을 침범당한 고릴라’의 모습을 대사 한 마디 없이 실감 나게 표현해냈다. 설마 했는데 영화가 끝날 때까지 그는 정말로 목소리를 단 한 번도 내지 않는다. 그런데도 나는 왜, 영화를 보는 동안 그가 외치는 소리를 들은 것 같은 착각을 느꼈을까.
내가 들은 ‘소리 없는 아우성’은 초희가 태인의 ‘영역을 침범’한 순간부터 시작된다. 그가 알고 있는 세상의 일이란 창복을 따라 계란을 팔아 돈을 벌고, 시체를 치우고 묻어 돈을 버는 일뿐이었다. 그렇게 번 돈으로 배를 채우고, 배가 부르면 쓰러져 자고, 아침이 되면 다시 창복과 함께 계란을 팔고, 시체를 묻으러 나간다. 옷, 쓰레기, 생활 용품이 한데 뒤섞여 발 디딜 틈조차 없는 집에는 그와 마찬가지로 ‘사회화’가 안 된 야생의 여동생이 살고 있다. 두 남매가 무슨 연유로 사회와의 소통에서 소외됐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 그의 집에 제 나이 또래보다도 ‘사회화’가 앞선 초희가 발을 들여놓는다. 그녀는 옷을 차곡차곡 개켜 놓고, 부러진 상다리를 고쳐 ‘인간’ 다운 밥상을 차리기도 한다. 태인은 그런 그녀로부터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인간’ 다운 삶에 대해 배울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를 품는다.
하지만 몸값을 받으러 갔던 창복에게 연락이 오지 않자 미리 약속한 대로 초희를 장기 매매 업자에게 넘긴다. ‘사회화’의 길을 알려줄 거라고 기대했던 초희와 함께 할 수 없어서인지 혹은 다른 어떤 이유에서인지 태인은 마음이 불편하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벽에 걸린 양복을 보는 순간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깨닫는다.
‘인간’의 양복을 걸친 그는, 창복 혹은 다른 누군가의 지시가 아니라 순수한 자신의 자유의지로 초희를 구하러 달려간다. 비로소 '고릴라'에서 '인간'으로 진화의 첫 발을 내디딘 그는, 노란색 유치원 봉고차를 가장한 장기 매매 업자의 차량에 실려 어디론가 가고 있던 초희와 아이들을 모두 구한다. 이 장면에서 나는 인간의 본성이 어쩌면 선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약간의 희망을 보았다. 선과 악을 분간하는 방법조차 배우지 못한 태인이 초희를 구한 것은 아마도 ‘선’에 대한 본능적인 이끌림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모두 괴물이 된다?
처음에 아무런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영화를 보다가 토끼 가면을 쓴 초희가 태인과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중단했었다. 바로 직전에 본 <담보>와 엇비슷한 내용일 거라고 지레짐작한 탓이다. 유괴당한 아이와 인질범 사이의 교감을 다룬 뻔한 내용인가 싶었다. 그러다가 홍의정 감독과 유아인 배우의 인터뷰를 찾아본 후 별주부전, 생존, 괴물 등을 언급한 점이 흥미로워 자세를 고쳐 잡고 다시 보기 시작했다.
이 영화는 스스로 정할 수 없는 각자의 환경에서 생존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괴물이 되는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홍의정 감독이 여러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그래서 처음에 영화 제목으로 ‘소리도 없이 우리는 괴물이 된다’를 생각했었다고 한다.
영화를 본 건 3주 전인데 감상평을 적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예상과 달리 묵직한 생각거리를 안겨줬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이 영화가 '선과 악의 갈림길에 선 두 남자, 창복과 태인의 선택'에 관한 이야기로 다가왔다. 영화를 보는 눈이 부족해서인지 인터뷰를 통해 소개됐던 상징들은 잘 와 닿지 않았다.
생존을 위해 괴물이 되는 평범한 사람들을 표현하기 위한 선택이었을지는 모르지만 상상조차 끔찍한 아동 대상 범죄를 가벼운 방식으로 접근한 영화적 표현들이 나는 못내 보기 불편했다. 창복을 포함한 범죄자들의 캐릭터는 하나같이 친근하고 유머러스하며 그들의 배경에는 언제나 아름다운 자연 풍광이 펼쳐진다. 소주를 탄 요구르트를 먹여 아이를 잠재우고, 시체를 처리하는 현장에 아이를 동행하고, 유괴된 아이의 몸값을 흥정하는 그들의 선택이 ‘어쩔 수 없는 생존’의 문제라는 점에 대해 나는 동의하기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