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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일상 공감

드라마에 과몰입하면 생기는 일...

일상공감_슬의생과 건강 검진 그리고 헬라 세포

by ALONE

잊을 만하면 돌아오는 건강 검진, 안 하자니 찝찝하고, 하자니 참으로 귀찮다.

올빼미족이다 보니 잠든 지 서너 시간도 채 안 된 이른 시간에 집을 나서야 하는 게 부담스럽다.

평소 가렵지 않으면 건드릴 일이 없는 몸 구석구석이 건드려지는 기분도 별로다.

몇몇 검사는 아프고 고통스럽다. 위 내시경이 목구멍으로 쑥 들어올 때마다 '수면 검사로 할 걸 그랬다'라고 후회를 한다. 하지만 3-4분만 꾹 참으면 보호자를 동반하거나 운전을 못하는 번거로움을 피할 수 있다 보니 늘 비수면 검사를 신청하게 된다.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겠지만, 역시 가장 고통스러운 건 유방암 검사인 것 같다. 사정없이 잡아당기고, 세게 누르고 아주 난리도 아니다. '악' 소리가 절로 나오는, 상당히 고통스러운 상태로 몇 초간 정지 동작을 취해야만 한다. 그래야 질병을 진단하는 데 유의미한 방사선 사진을 찍을 수가 있다고 한다. 최근 코로나19를 핑계로 미루고 미루던 건강 검진을 받았다.


산부인과 검사를 위해 대기하고 있는데 감은 지 며칠은 되어 보이는, 기름이 좔좔 흐르는 긴 머리를 질끈 묶은 어여쁜 여자 전공의 한 분이 내게 아이 컨택을 해왔다. 마침 슬기로운 의사생활 시즌2를 정주행 하며 꿀잼에 빠져있던 때라 속으로 '추민아 선생이네ㅋㅋ'하며 눈웃음으로 화답했다. 그랬더니 잠시 드릴 말씀이 있다며 내 옆으로 다가왔다. 사정인 즉슨, AI 방사선 사진 판독 시스템을 도입했는데 정확도 실험에 내 사진을 썼으면 한다는 거다.


평소의 나라면 단호박으로 거절해버렸을 텐데. 이미 머릿속으로 드라마를 찍고 있던 나는 겸손하게 동의를 구하는 어여쁘고 친절한 '추민아 선생'의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기로 했다. 설명을 다 듣기도 전에 '아유 고생하시는 데 당연히 해드려야지요'하면서 서류에 사인을 해주는 바람에 오히려 '추민아 선생'이 약간 당황했다는...


내 차례가 되어 방사선 촬영실에 입장했더니 실험 참가자가 맞냐고 물었다. 아무래도 실험에 쓰일 사진이다 보니 더 잘 찍어야 했을까?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최고 강도의 유방암 검사를 받고서야 비로소 현실 감각이 돌아왔다. (방사선 담당 선생님도 '장겨울 선생'을 닮은 젊고 어여쁜 여자분이었...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 그날 저녁 팔 상박부와 주요 촬영 부위에 퍼렇게 멍이 올라왔고, 일주일 동안 샤워할 때마다 얼룩덜룩한 상반신을 보며 검사 당시의 악몽을 떠올려야 했다.


검사 결과가 음성이었기에 망정이지 만일 작은 종양이라도 하나 발견되었더라면 어쩔 뻔했는지. 드라마에서 익히 본 것처럼 수십 명의 의사들이 세미나실에 모여서 내 가슴 사진을 대문짝만 하게 띄워놓고 면밀히 뜯어보고 분석했을 텐데, 상상만 해도 얼굴이 화끈, 가슴이 철렁하다. 드라마에 과몰입한 탓에 뜻하지 않게 의학 실험에 기여를 할 뻔한 것이다.


그 일을 겪은 후 나의 경우와는 좀 다르지만 '불멸의 헬라 세포(HeLa Cell)'가 떠올랐다. 1951년 자궁경부암으로 사망한 흑인 여성 헨리에타 랙스((Henrietta Lacks)로부터 채취한 암세포의 이름이다. 그녀의 암세포가 배양 접시에서 무한 증식되어 전 세계 연구실로 퍼져나갔고, 지금까지도 의학 실험용으로 쓰이고 있다. 문제는 그런 사실을 랙스 자신은 물론 가족조차도 전혀 몰랐다는 것이다.


만일 나의 세포였다면, 의학 발전에 기여했다는 점도 물론 뿌듯하겠지만 그로 인해 경제적인 이익이 발생했다면 응당 세포의 주인인 나에게도 그 이익이 분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류애도 중요하지만 자본주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이 아닌가. 간혹 공공의 이익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개인의 시간을 희생하고, 돈이나 노동을 무상으로 제공하는 일을 높게 평가하는 상황을 맞닥뜨리면 이것저것 따져보게 된다. 이기적이고 치사한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세상의 모든 일에는 이면이 존재하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이런 내가 의학 실험 참가 동의서를 썼다니 드라마에 지나치게 과몰입한 게 아니라면 설명할 수 없는 일이다. ㅋㅋ


어쨌거나 랙스가 사망한 지 70년이 지나서야, 미국의 한 의학 연구소가 유족의 동의 없이 세포를 실험에 사용한 것에 대해 사과하고 거액을 배상하기로 했다고 한다. 너무 많이 늦었지만 당연히 이루어졌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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