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공감
얼마 전 마트에서 나의 '분노'를 유발하는 빌런을 연달아 목격했다.
급하게 마늘이 필요해서 마트에 갔을 때다. 폐장이 임박한 늦은 시간이어서 그런지 매대에는 깐 마늘이 다섯 봉지밖에 남아 있지 않았고, 상태도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나마 상태가 제일 괜찮을 것을 고르겠다는 일념으로 눈에 힘을 빡~ 주고 정밀 스캔을 시작했다. 그때 마늘을 사려는 '경쟁자'가 등장했다. 그녀는 마늘 매대 앞으로 바짝 다가서더니 재빠르게 마늘 봉지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녀의 신속한 선택에 감탄하며 남아 있는 네 봉지 중 한 개를 고르려는 순간, 믿기 힘든 일이 벌어졌다. 그녀는 손에 든 마늘 봉지를 앞뒤로 뒤집어보더니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멀찌감치 내던져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곧바로 다른 마늘 봉지를 집어 드는 게 아닌가. 두 번째 마늘 봉지도 별로였던지 툭 하고 던지더니 세 번째 마늘 봉지를 집어 들었다. 나는 그녀가 던진 마늘을 사고 싶지 않아 제대로 살펴볼 겨를도 없이 아직 패대기 처지지 않은 두 봉지 중 한 개를 집어 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등 뒤에서 시선이 느껴져 돌아보니 그녀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왜지? ㅋㅋㅋ
얼마 전 과일 코너에서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마트 직원이 과일 코너에 복숭아 상자를 잔뜩 부려놓고 갔다. 한 상자 살까 해서 복숭아 상자가 쌓인 곳을 기웃거리고 있을 때 빌런이 등장했다. 그녀는 상자들이 쌓여있는 중간 지점, 아주 좁은 틈을 능숙하게 헤집고 들어갔다. 그러더니 굳이, 제일 안쪽 아래칸에 있던 복숭아 상자를 꺼내 바닥에 늘어놓았다. 열 상자 정도를 바닥에 깔아놓고 마치 직원이 불량품을 검수하듯이 복숭아를 속속들이 살펴보았다. 눈으로만 살펴보면 좋으련만. 포장 비닐 한 귀퉁이를 뜯고 손을 넣어 복숭아를 꺼내 이리저리 냄새를 맡기도 했다. 그렇게 마구잡이로 헤집어놓은 끝에 한 상자를 골라 카트에 싣고 가나 싶었는데 서너 발자국도 못가 되돌아오더니 카트에서 상자를 내려놓고 다시 복숭아 고르기를 무한 반복하는 것이었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복숭아를 사지 않고 그냥 왔다.
"진열된 상품 중에서 좋은 걸 고르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있겠지만 그래도 혼자 사는 세상도 아니고 저러는 건 좀 아니지 않아? 다른 사람에 대한 예의와 배려 그리고 공중도덕이라는 게 있는데!"
당시 느꼈던 '분노'의 감정을 떠올리며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침을 튀겨가며 열변을 토했다. 그런데 모두 비슷한 일을 한두 번쯤 목격했다면서도 나의 '분노'에 대해서는 공감하기 어렵다고 했다. 보기 안 좋은 모습인 것도 사실이지만 '분노'할 일인지는 모르겠다고 했다. 모두 나와 같은 마음일 거라 생각했다가 한방 먹은 기분이었다. 사람마다 '성격'에 따라 같은 일을 겪었을 때 나타나는 반응과 생각, 대처방식이 모두 다르구나 하는 사실을 또 한 번 실감했다.
지난봄부터 모사이버대학교에서 상담심리학을 공부하고 있는데 얼마 전 오프라인에서 에니어그램 특강을 들을 기회가 주어졌다. 무척 흥미롭고 유용한 시간이었다. 에니어그램 성격유형에 관해서는 여기저기서 많이 주워듣기 했지만 해당 분야 전문가로부터 직접 강의를 들은 것도 처음이고, 내가 직접 검사에 응한 것도 처음이었다. 검사 결과를 보니, 신기하게도 내가 속한 성격 유형의 약점이 바로 '분노'였다.ㅋㅋㅋ
'옳고 그름이 분명하며 양심적이고 윤리적이지만 분노와 조바심을 억제하지 못하는 성격'이라나 뭐라나. 나의 성격 유형에 해당하는 설명을 보니 족집게 무당도 울고 갈 만큼 나에 대해 속속들이 맞는 말만 나와 있었다. 물론 자기 평가 검사, 즉 스스로의 선택과 판단에 의해 결과를 얻는 검사이므로 완전히 객관적이라고 보긴 어려울 수도 있지만 가족들조차 설명이 나의 실제 성격에 부합된다고 입을 모았다. 꽤나 신빙성이 있는 검사라는 생각이 들어 요즘 관련 책들을 뒤적거리는 중이다.
아무튼 추천 좌우명으로 나와있는 '심판하는 사람은 사랑할 시간이 없다'라는 말을 가슴에 새기고, 앞으로 마트에서 빌런들과 마주치더라도 '분노'하는 대신 침착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피해 가야겠다.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