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디종] 기대없이 걷다 마음을 빼앗기다

by 김풍류

여정은 파리 공항에서 시작됐다. 늘 그렇듯, 여행은 기대보다는 현실로 먼저 다가온다.
스키 장비까지 바리바리 챙겨 렌터카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크리스마스 시즌 요금은 마음의 준비가 안 된 나를 가볍게 강타했다. ‘이 돈이면 부르고뉴 와인 몇 병은 거뜬했겠는데…’
프랑스 특유의 느긋한 서류 처리 속도에 점점 에너지가 빠져나가던 찰나, 마침내 차 키를 받고 도로로 나섰다.

파리를 빠져나오는 길은 그야말로 인내심의 테스트였다. 교통체증, 먹통이 된 유심칩, 그리고 연결되지 않는 지도.
20분 넘게 도시를 빙글빙글 돌다 보니 ‘이게 진짜 프랑스 스타일인가’ 싶은 자조적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해는 일찍 졌고, 고속도로는 비에 젖어 칠흑 같은 터널처럼 느껴졌다. 도중에 잠을 이기지 못하고 휴게소에 들어가 콜라 한 캔을 마시고, “잠깐만” 눈을 붙인다는 말과 함께 1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결국 디종에 도착한 건 자정이 넘은 시각. 온몸이 녹초가 되어 있었다.

숙소 앞에는 먼저 유럽을 여행 중이던 여자친구가 마중 나와 있었다.
오랜만에 만났지만, 오래된 연인 특유의 쑥스러움이 말 앞에 선을 그었다. "왔어?"
그래도 그녀가 건넨 가라아게와 주먹밥은 이 세상 어떤 만찬보다도 고마웠다.

디종으로 넘어오는 고속도로에서도 아무것도 못 먹었으니, 그 순간의 한 끼는 거의 구원에 가까웠다.

단숨에 잠들었고, 시차 덕에 새벽 6시에 눈이 번쩍 뜨였다. 몸은 분명 피곤했지만, 머리는 “한국 시간으론 지금 점심이거든요?” 하고 외치는 것 같았다.
뒤척이다가, 차라리 밖으로 나가 보기로 했다.

디종에 대해선 사실 별 기대가 없었다. ‘머스타드로 유명한 곳’이라는 애매한 이미지 하나.
하지만 새벽의 거리에서 마주한 도시는 예상 밖이었다.
해가 채 뜨지 않은 골목을 걷다 보니, 고요하면서도 깊은 풍미가 느껴졌다. 오래된 석조 건물들, 삐죽 솟은 첨탑, 아치형 창문…
보르고뉴 공국의 옛 수도였다는 이 도시의 역사가, 건물 외벽에, 돌길 바닥에, 그리고 이른 새벽 공기 속에 켜켜이 쌓여 있었다.

가로등 불빛이 건물 외벽을 은은하게 물들이고, 차가운 공기 위에 겨울의 고요함이 내려앉은 풍경은, 마치 오래된 동화책 한 페이지를 걷는 듯한 기분이었다.
교회와 성당들이 즐비했고, 하나 들어가 기도 의자에 앉자 고요한 공기와 스테인드글라스의 빛이 조용히 마음을 감쌌다.
비몽사몽한 정신이 잠시 고요함에 잠겼다.

빵집 앞 줄은 이 도시의 아침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는 풍경이었다.
프랑스 빵 특유의 고소한 향이 퍼지고, 어설픈 발음으로 “Bonjour, ça, s’il vous plaît!” 주문하면 따끈한 크루아상이 손에 들어왔다.
갓 구운 빵과 종이컵 커피 한 잔이면, 그 새벽의 차가움도 얼마든지 견딜 수 있었다.
그 순간만큼은 ‘이 도시의 누군가가 된 기분’이었다. 아주 잠깐이나마.

세 시간쯤 골목을 누비고 나서야 피로가 밀려왔다. 숙소로 돌아와 여자친구에게 말했다.
“생각보다 디종, 엄청 좋던데?”
콜마르로 이동해야 해 오래 머물 수는 없었지만, 떠나기 아쉬운 마음이 진하게 남았다.
다음에 다시 오게 된다면, 일정도 여유롭게, 머스타드뿐 아니라 진짜 부르고뉴 음식과 와인을 제대로 음미해보고 싶었다.

결국 여행이란, 크게 기대하지 않았던 순간에서 마음을 빼앗기는 일의 연속인지도 모른다.
이른 아침의 산책 한 번이, 온 하루를 충만하게 만들어주니까.

디종의 골목은 지금도 그 새벽의 공기를 머금은 채, 누군가 또 다른 여행자의 발걸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게, 다시 나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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