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밤과 새벽의 공존
콜마르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어둑한 밤공기가 도시를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차를 세울 곳을 찾느라 30분 넘게 빙빙 도는 동안, “아, 이곳이 바로 크리스마스 시즌의 콜마르구나” 하고 실감하게 되었다. 겨우 주차를 마치고 골목으로 나서자, 크리스마스 장식 불빛과 사람들의 말소리가 자연스레 발걸음을 이끌었다.
콜마르에는 무려 9개의 크리스마스 마켓이 펼쳐져 있다고 들었다. 내가 먼저 마주한 곳만 해도 인파가 빼곡했는데, 평소라면 그런 혼잡함을 피하고 싶어 했을 텐데도, 여긴 왠지 달랐다. “먼저 뱅쇼부터!” 하고 주머니를 뒤졌지만, 현금이 전혀 없고 카드 결제는 25유로 이상부터 가능하다고 해 이내 포기했다. 대신 타인이들고 있는 뱅쇼에서 풍기는 은은한 향과 그들의 즐거운 표정을 보며, 머릿속으로만 ‘한 모금’을 마시는 상상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그래도 한껏 들뜬 기분을 품고 크리스마스 마켓 사이를 누비기 시작했다. 이곳저곳을 둘러보면서,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도 다들 어찌 그리 기분 좋게 웃고 있는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많은 인파때문에 누군가 어깨를 살짝 부딪혀도 서로 미안하다며 웃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이게 성탄절의 마법인가?’ 하는 생각도 자연스레 떠올랐다.
그리고 무엇보다 충격적이었던 건, 콜마르 전체가 원래도 동화책 속 마을 같기로 유명한데, 크리스마스 장식까지 더해지니 그야말로 현실감이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옛날 영화와 애니메이션 속 ‘신비한 겨울 도시’를 1:1로 재현해낸 듯 보였다. 건물 외벽마다 화려한 전구가 빛나고, 창가에는 아기자기한 곰 인형과 리스가 놓여 있었다. 어느 쪽으로 고개를 돌려도 반짝이는 소재들이 시선을 붙들고, 바닥의 오래된 돌 틈으로부터 삭삭 올라오는 냄새까지 뭔가 포근하게 느껴졌다.
콜마르의 9개마켓을 전부 천천히 돌아보려면 하루도 부족하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단 눈에 띄는 대로 이곳저곳을 헤매듯 걸었다. 그러다 유리공예 매대 앞에서 발걸음이 멈췄는데, 마치 영화배우처럼 잘생긴 청년이 자신이 만든 유리 작품을 선보이는 중이었다. 여자친구는 그의 ‘외모’를 감상했고, 나는 ‘유리’를 감상한 셈이지만, 묘하게 똑같이 구경하는 듯한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슬쩍 “얼굴도 직접 빚은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내 프랑스어 실력은 잠깐 미소나 건네는 데 한계가 있었다. 애써 참으며 “메이드 인 프랑스”를 확인하고 곧장 하나를 장만했다.
계속 돌아다니다 보니, 아무리 즐거워도 배고픔은 피해가기 어려웠다. 호텔에서 받은 지도도 있었으나, 너무 들떠 제대로 찾아보지 않고 발길 닿는 대로 레스토랑을 기웃거렸다. 그러다 답답했는지 여자친구가 직접 검색을 하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이런 건 내가 검색하거나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편이다. 그런데 이날만큼은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푹 빠져 감상에 젖다 보니, 주린 배를 채울 식당을 찾는 일마저 여자친구가 나서서 검색해 줬다. 보통 같으면 “왜 아무것도 안 찾아봐?” 하고 한 소리부터 들었을 텐데, 마법의 단어 "크리스마스잖아" 덕분인지 우리 사이에도 알 수 없는 평화가 깃들었다. 덕분에 나도 마음 편히 마켓 풍경을 감상하며, 오랜만에 ‘잔소리 프리’ 여행을 즐길 수 있었다.
대부분이 예약이나 웨이팅으로 가득한 가운데, 운 좋게 한 곳에 자리가 생겨 들어갔다. “9시까지만 가능하다”기에 시계를 보니 7시 15분. 보통 프랑스 사람들은 식사와 대화를 오래 즐기는지 1시간 45분으론 모자라겠다 싶었지만, 한국인의 스피드라면 식사에 충분했다.
문어요리와 새우요리, 그리고 소고기요리를 시켰는데, 에피타이저로 나온 문어와 새우의 양이 꽤나 넉넉해 만족스러웠다. 차를 가져왔기에 와인은 한 모금 맛보는 수준에 그쳤지만, 알자스 화이트 와인 특유의 상큼하고 부드러운 풍미가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다음날 결국 마트에서 Muscat Ottonel 2023 빈티지를 구입하게 되었다. 그 와인은 입속에서 싱그러운 과실향이 터지면서도, 이면에는 차분한 허브 풍미가 깔려 있어, 한겨울임에도 봄볕 아래 서 있는 듯한 기분을 선사했다.
식사를 마치고 나와 대관람차 부근을 기웃거렸는데, 작은 공연과 이벤트가 열리는, 마치 한국의 어느 지역 축제 같은 분위기였다. 길거리 음식도 다채롭고 합리적인 가격으로 보여 “백종원 솔루션이라도 받았나?” 하는 실없는 농담까지 할 정도였다. 프랑스에 오면 한 번쯤 맛보겠다던 굴과 달팽이들이 나를 유혹 했지만, 이미 배가 포화 상태여서 참기로 했다.
호텔로 들어간 시간이 10시도 안 되었는데, 일찍 돌아온 이유가 있었다. 다음날 아침, 콜마르의 고요한 새벽 풍경을 보고 싶어서였다. 밤에는 사람에 치여 건물을 천천히 살피지 못한 아쉬움이 컸기에, 꼭 해가 채 떠오르지 않은 시간대에 다시 나가 보고 싶었다. 7시 30분경, 한 시간 무료 주차를 믿고 어제와 같은 곳에 차를 대고 빠른 걸음으로 골목을 누볐다.
역시나 아침의 콜마르는 밤과 완전히 다른 얼굴을 보여주었다. 음악과 불빛으로 가득했던 골목이 고요해지고, 은은한 새벽빛이 건물 외벽을 살며시 비추고 있었다. 조깅하는 사람, 아침 장사를 준비하는 주인, 창문을 열어 환기하는 모습이 어우러져 “오늘은 이들이 연출의 주역인가” 싶을 만큼 아름답게 느껴졌다. 새벽 공기와 남아 있던 장식용 조명들이 함께 만들어 낸 풍경은, 어제의 화려함과는 또 다른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 유명한 ‘하울의 움직이는 성’ 모티브가 된 건물도 찾아갔다. 독특한 곡선과 첨탑이 살짝 비현실적으로 보이는데, 여기에 반짝이는 장식까지 얹히니 애니메이션 속 한 장면이 현실에 펼쳐진 느낌이었다. 트리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데도 그 존재감이 꽤나 뚜렷해, 오히려 건물을 더 신비롭게 돋보이게 해 주었다.
리틀 베네치아’로 유명한 구역도 빼놓지 않았다. 밤에는 인파에 떠밀리듯 지나쳐 버렸는데, 아침에 보니 파스텔 톤 건물들이 물가를 따라 차분히 늘어서 있었다. 물 위로 새들이 살짝 날아오르는 모습까지 더해져, 말 그대로 그림엽서 속 풍경을 보는 기분이었다. 은은한 반목조 건물과 수면에 비치는 잔잔한 빛이 어우러져, “아, 이래서 콜마르가 사랑받는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었다.
그렇게 한 시간쯤 돌아다닌 뒤 주차장으로 돌아가며, “이 도시는 밤과 새벽, 그리고 낮까지도 정말 서로 다른 얼굴을 지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더욱 극적으로 드러나는 것 같았고. 마치 축제의 현장이었다가, 조용한 미술관이 되었다가, 다시 일상으로 깨어나는 변주가 무척 자연스러워 감탄이 절로 나왔다. 이번엔 뱅쇼 한 잔도 못 마신 게 조금 아쉽지만, 이미 가슴 가득 동화 같은 추억을 담았으니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문득 “다음번에 오면 콜마르가 또 어떤 표정으로 반겨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어쩌면 그 호기심 자체가, 크리스마스가 내게 선물한 가장 큰 기쁨일지도 모르겠다.